오늘 오전에 윌리엄 어빈의 <직언>을 읽다가, 잠시 내가 죽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체험해보려고, 아파트 베란다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는 상상을 해보았다.
바닥과 몸이 닿을 때 아플까 봐 두렵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추할까 봐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 모습을 상상할 때 마음이 아팠던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픔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아내가 떠올랐다. 내가 없으면 아내의 일상이 외롭고 허전하고 힘들 것이었다. 그 모습을 상상할 때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부모님, 형제자매도 떠올랐다.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인생에서 이루어나갈 성취는 반드시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수반할 것이었다.
삶은 죽음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다.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내면의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된다. 그것은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이다.
내가 가진 욕망과, 나의 약한 마음과, 몸이 경험하는 불편함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삶에서 행복은 극히 일부이고, 그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따라서, 죽음이 두려운 유일한 이유는 삶을 잃는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삶에서 그나마 조금 있는 행복, 즉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었다.
더 엄밀하게는, 그 관계를 깨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내가 그들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져도 아프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사라짐으로써 그들이 슬퍼지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사라졌을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죽는 게 두렵지 않다.
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크지 않다.
세상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나 많고, 가보지 않은 아름다운 여행지도 너무나 많지만, 죽음 이후도 그 이상으로 흥미롭다.
죽음 이후에 이제까지 죽은 모든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면 그 또한 재미있을 것이고, 앞으로 죽을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
죽음 이후에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행복을 줄 것이다.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고 나라는 존재가 철저히 '무'로 돌아가 어떠한 사고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그 또한 우주와 나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무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두렵지 않다.
결국 오늘의 나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한다기보다는, 나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