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 뭘까?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재석이의 질문에, 저녁 후 짬 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대개 그렇듯, "책임"이라는 단어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책임"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는 책임은 크게 두 가지 뜻을 갖는다. 둘은 맥락에 따라 함께 다니기도 하고, 떨어져 다니기도 한다.
첫째 뜻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혹은 이행되지 않았을 때 헌신, 손해,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그 말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래도 실현되지 않으면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책임을 지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 성립한다. 약속을 지킬 누군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보상할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 책임을 진다." 또는 "(누구에 대한) 책임"으로 사용해야 한다.
둘째는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용례로 사회적 책임, 도덕적 책임이 있다. 이런 책임은 나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도덕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뜻한다. 일터에서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그 책임을 부여한 사람(상사)이 기대하는 바를 달성해야 함을 뜻한다. 이번에도 책임은 대상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래서, 둘 이상의 대상으로부터 상충하는 기대를 받을 때는 불가피하게 한 쪽에 무책임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물에 빠졌을 때 누구부터 구할래?" 류의 삼각 관계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종류의 '무책임'은 반드시 비난의 대상이라고 볼 수 없다. 설상가상, 타인의 기대를 내 뜻대로 저지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의도치 않게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다. 공인이 그렇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에게는 일반 사람보다 훨씬 큰 기대가 걸려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실수에도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가령 사랑 받는 연예인이 황금기에 결혼해서 팬들과 소속사에게 무책임하게 비치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무책임"이라는 단어가 부정적 뉘앙스 없이 가치 중립적인 단어로 쓰여야 한다. 그저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일 뿐, 시비를 따졌을 때 그른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 중 한 가지로만 책임을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논란을 빚은 정치인이 '책임지고 사퇴하겠다'고 하는 것은 책임을 첫 번째 뜻에 한정지은 것이다. 약속을 못 지켰으므로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퇴한다고 해서 기대에 부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퇴는 도망이나 도주에 가까우므로, 기대에 어긋난 행동이다. 따라서 사퇴는 무책임한 행동이다.
끝으로 책임은 신뢰와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책임지는 행동은 나의 신뢰도와 평판을 좌우한다. 그래서 책임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나, 부응할 수 없는 기대는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행동이다. "내가 한 번 해볼게!"를 책임이 뒤따르면 이 선언은 용기의 소산이다. 그러나 책임이 따르지 않으면 이 선언은 무식의 소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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