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서의 번지 점프

by Dongeun Paeng
Feb 05, 2024 · 만 34세

물론 절벽에서 번지 점프하는 일은 없다.


2015년 마카오에서 233m 높이의 번지 점프를 한 적은 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번지 점프 타워다. 그 땐 그걸 안 해보고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아, 소위 '후회 최소화 법칙'을 따랐다.


지금은 마카오 타워를 앞에 두고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다. 아마 안 뛸 듯하다. 안 뛰어도 후회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여하간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종종 절벽에서 번지 점프를 뛰듯 스스로 성장할 환경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아찔하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집착한 적이 몇 번 있다. 그 동기는 잘 모르겠다. 누구의 인정이 필요한 것도 아닌 듯하다. 내면의 만족을 위해 높은 목표를 정한 적도 있고, "두고봐!"라는 심리에서 이를 갈며 높은 목표를 세운 적도 있다.


2010년 카투사 훈련소에서는 체력 검사에서 반드시 1등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결국 1등을 했다. 이 때는 누구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저 내 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2016년 체지방률 10%를 달성하고 바디 프로필을 찍을 때도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독하게 했다. 반면 누군가에게 증명할 목적으로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한 적도 꽤 많다.


이유야 어쨌든, 어떤 것에 한 번 꽂히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편이다. 영국 Open University 수학 학사 과정도 그렇다. 나는 수(數)와 논리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수학을 가까이 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만 하더라도 미분조차 못했다. 어려워서 못했다기보단 방법을 알지 못하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학은 앎과 모름의 경계가 분명한 학문이다. 수학 지식의 추상화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즉, 사고력, 논리력, 창의력이 아무리 발달해도 '모르면 못 푼다'.


예를 들어보자. '자코비안 행렬을 이용해 비선형 연립 미분 방정식을 linearise하라'는 문제는 한 번 접근 방식을 알고 나면 무척 쉽다. 그런데 그 방식을 백지에서 생각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사실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싶다.)


'자코비안 행렬'이라는 개념 자체가 높은 추상화 수준의 증거다. 자코비안 행렬 J\mathbf{J} 는 다음과 같다.


J=[uxuyvxvy]\mathbf{J} = \begin{bmatrix} \frac{\partial u}{\partial x} & \frac{\partial u}{\partial y} \\ \frac{\partial v}{\partial x} & \frac{\partial v}{\partial y} \end{bmatrix}


우리는 위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우변을 떠올릴 필요 없이, 우선 J\mathbf{J} 만 가지고 문제를 푼 다음 마지막에 우변으로 바꿔주면 된다. 이런 게 추상화다.


또 글이 산으로 갔는데... 시간이 늦어 집중이 안 되나 보다.


아무튼, 1년 전에 나는 미분도 몰랐지만 일단 수학을 배우고 싶었다. 인강도 찾아보고 책도 읽어봤지만 좋은 커리큘럼을 쭉 따라가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아서, 학사 학위 과정을 밟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는 학사 과정 중에, on campus 과정과 비교했을 때 권위가 동등하거나 더 높은 학교를 찾아보았고, 그 과정에서 영국 Open University를 발견했다.


사업과 결혼생활을 병행하면서 대학을 다니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일단 저지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국 Open University 수학 학사 과정은 full-time students 기준 3년 걸리고, part-time students 기준 6년 걸린다. 나는 6년이나 공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무조건 3년 안에 마치겠다고 결심했다.


1학년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은 2학년이 되어 편미분방정식과 해석학, 선형대수학, 군론 등을 배우고 있다. 1년 전과 비교해보면 꽤 큰 변화다. 그간 사업을 하면서도 여러모로 많이 성장했지만, 지난 1년은 색채가 다르다. 경험이 아닌, 지식의 증가가 주된 성장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업가 찰리 멍거는 모든 주요 학문의 핵심을 섭렵하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나는 심리학, 경제학, 물리학, 생물학에는 멍거만큼 큰 관심이 (아직은) 없다. 수학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내년에 3학년을 마치면 2.5년 만에 졸업하는 셈이 된다. 이 대학에서 First Class(우수 졸업)로 졸업하면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석사 과정(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석사 과정이라고 해서 또 호기심이 발동한다.)에 지원할 수 있고, 미국 대학에 지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석사 과정부터는 online courses가 없어서 욕심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Oxbridge 같이 수학으로 널리 알려진 학교들의 학사 과정은 내가 공부 중인 과정보다 범위가 좀 더 넓어서, 석사 입학을 하면 gap filling이 상당히 어려울 수 있다. 그러면 어떤가. 일단 저지르고 나면, 어찌저찌 따라잡지 않을까? 늘 그랬듯.


주절주절... 써놓고 보니 주워담기 힘든 글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1) 나는 가끔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일단 저지르고 보는 편인데, (2) 지금 공부중인 수학 학사 과정도 그렇게 시작했고, (3) 그 결과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1)에서 잠깐 예전에 했던 도전들 얘기로 새었고, (2)에서는 수학적 추상화 얘기로 새었다. (3)에서는 찰리 멍거와 향후 계획 얘기로 새었다.


이제 진짜 글을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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