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두 번 중 첫 번째가 끝났다.
선형대수학, 해석학, 추상대수학 총 12문제를 4시간 30분 동안 풀어야 했다.
오픈북 시험이라 어렵진 않지만 꼼꼼하게 작성하느라 4시간 10분 걸렸다.
간만에 즐거운 경험이었으므로 관련해서 드는 생각 몇 가지 남긴다.
1.
내 생각에 오픈북 시험은 지식과 문제풀이 능력만큼이나 준비 전략이 중요하다.
그리고 준비 전략의 상당 부분을 gizmo가 차지한다.
우선 단원마다 있었던 마무리 퀴즈가 기출 범위와 많이 겹칠 것이므로, 각 PDF로 존재하는 그 퀴즈들을 모두 열어두었다.
맥북에서는 네 손가락으로 마우스패드를 쓸어올리면 열려 있는 창이 모두 뜨는데, 마우스를 올리면 파일명이 뜬다.
파일명이 단원명이므로 내가 찾아가야 하는 파일을 빠르게 열 수 있다.
핵심은 PDF를 모두 켜놓는다는 것이다.
한편, 문제만 오려서 하나의 PDF 파일로 따로 묶어두었다. 그 파일의 이름은 예를 들어 "모든 문제 모음"이다.
시험 문제를 보면 분명히 익숙한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날 것이다. 그 때 "모든 문제 모음" PDF를 빠르게 훑으면서 비슷한 문제를 찾으면 된다.
비슷한 문제를 찾았으면 그 문제에 대해 내가 썼던 답을 찾아야 하는데, 이 작업은 맥북이 아니라 아이패드에서 한다.
나는 늘 답안을 Goodnotes에 작성한다. (즉 physical legal pad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에 내가 썼던 답안을 찾으면 일이 쉬워진다. 그 답안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한 후, 필요한 변수만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면 된다.
만약 physical legal pad를 사용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일이다. 이게 시간을 많이 아껴준다.
그렇다고는 해도 Goodnotes에서 모든 답변을 손으로 쓰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특히 증명 문제가 그렇다.
짧고 단순한 문제를 풀더라도 아래 문장들이 자주 쓰인다.
From the previous question, we know that ~~~. It follows that ~~~. Also, it is given that ~~~. Hence we deduce that ~~~.
그래서 맥북에 Emacs를 켜놓았다. 이 에디터에서 긴 문장을 빠르게 타이핑한 후 복사하면, 아이패드로 붙여넣기 할 수 있다.
이것도 엄청나게 편리한 기능이다. 윈도우 OS에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다.
이외에도 창 크기를 빠르게 조절할 수 있는 Raycast와 PDF에서 strict keyword search를 켜놓는 등 사전에 해둘 작업이 많다.
아, 그리고 맥북에 커다란 모니터도 2개 연결해두었다.
이렇게 환경을 잘 갖춰두면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이런 준비가 점수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
나와 비슷한 수준인 학생이 교과서와 머리만 갖고 시험을 쳤다면 아마 시간이 모자라 80점 정도 기록할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iOS, macOS의 여러 편의 기능을 연구하고 준비하는 것이 점수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
2.
중간쯤에 문제 오류가 하나 있었다.
"State a standard group isomorphic to the quotient group , brieftly justifying your answer."라는 문제였다.
앞서 라는 homomorphism(준동형사상)이 주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kernel은 domain(정의역)의 normal subgroup(정규부분군)이므로 문제가 말이 안 됐다.
여기서 조금 헤매는 바람에 시간을 꽤 썼다. 일단 별표 쳐놓고, 다른 문제 다 풀고 나서 다시 보니 문제가 잘못됐다는 게 확실해보였다.
고민 끝에 답안에는 "Since is not a normal subgroup of G, we can't form a quotient group . Instead we find the isomorphic group of ."라고 쓴 후 동형군을 찾아서 제출했다.
시험 끝나고 조교에게 "I hope I'm wrong, but please check if it's indeed an error."라는 메일을 남겼다. 몇 시간 뒤 학교에서 문제에 오류가 있었다고 공식 메일이 왔고, 홈페이지에도 새빨간 글씨로 안내 문구가 실렸다.
3.
문제를 풀어보기 전까지는 수학 개념을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다. 교재 설명을 읽을 때는 쉽게 이해되는데, 막상 문제는 못 푸는 경우가 허다하다. 알고 보니 이해를 못한 것이다. 남이 써놓은 글을 이해하는 것과, 그 개념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문제를 푸는 과정은 지루하고 짜증나지만, 그 과정이 없으면 절반만 완성한 것이다.
수학뿐 아니라 대개 그렇다. 실패, 감점, 처벌이 있는 도전이야말로 skin in the game의 증거다. 똑똑하지만 진정 ‘홀로 서기’ 해보지 않은 직원들이 회사에 얼마나 많은가.
어려운 문제는 답을 보지 않고 끝까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해가 깊어진다. 그리고 많이 틀려봐야 한다. 그래야 공백이 줄어든다.
예제를 풀었는데 다 맞으면 난이도를 높여야 한다. 틀리면 기분이 좋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시험 전 미리 알게 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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