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사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사람이 아내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단어가 있다.
샤덴프로이데.
남의 고통이나 불행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우리 말의 시기, 질투와 어울리는 단어다.
아무튼, 그 사람 이야기는 그만 하고... 이 단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어떤 단어가 살아남으려면 그 단어의 의미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합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표현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단어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살아남아 대대로 전해진다. 비록 아스라한 수준이지만 모두가 합의 가능한 사랑의 느낌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뜻이 구체적인 단어일수록, 그것의 생존은 큰 의미를 띤다. 구체적인 풀이에 합의점이 모여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풀이의 대상이 분명하다는 증거다.
샤덴프로이데가 썩 좋은 예다. "남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란 얼마나 구체적인 설명인가?
이 단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여느 어른이라면 바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느 어른이라면 남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느껴보지 않은 감정은 사전에서 그 해석을 본다고 한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지금 샤덴프로이데를 느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질투심을 인정하는 순간 스스로 한없이 값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입 밖으로 고백하기 가장 어려운 감정이 질투라는 말도 있다.
그렇더라도 샤덴프로이데는 누구나 은밀하게 갖고 있고, 잘 알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아무리 당당해보이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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