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eun Paeng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오랜만에 별 생각 없이 본 영화 한 편을 보고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갑자기 웬 영화? 안 바빠요?

물론 바쁘다. 설거지하면서 잠깐 보기 시작했다가, 잠이 안 와서 야밤에 남은 부분을 끝까지 봤다.

한 번 봤던 영화

희미하게 기억하기로는 이 영화를 어릴 때 한 번 봤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 났지만. 영화가 나온 게 2013년이니, 11년 전 대학교 3학년 때 봤을 것이다. 그 때도 넷플릭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국내에서 쓰는 사람은 일절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걸 토렌트로 받아서 곰플레이어로 보는 게 소위 "국룰"이었다.

월터와 나

그 시절의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자신 있고, 당당했다. 지금과는 꽤 많이 달랐다. 그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고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을 해내고, 얻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상상은 하지만 실제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일을 경험한다. 좋은 일만 포함하는 얘기는 아니다. 좋든 나쁘든, 남의 얘기일 것만 같은 것들을 실제로 겪는 게 영화 내용이다.

그 내용과, 낭만적인 배경음악(Space Oddity)과,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 내 모습이 어우러져 잠시 그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

"이게 나였다고?"라고 질문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이 생각난다. 아무 기준 없이, 그냥 마구잡이로 생각이 났다. 내 머릿속에 이런 기억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거칠 게 없던 시절

3점 초반대의 학점으로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신청해 다녀왔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미국 교환학생은 고학점이 암묵적인 선결 조건 같은 것이었다. 당시 나는 그런 건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내가 운영하던 동아리 십시일반의 기부 운영 방식을 기부 선진국 미국에서 배워오고 싶다고 강력히 주장하먼서, 성적 대신 명분으로 밀어붙여 교환학생을 따냈다. 지금의 나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사이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렇게 도착한 미국에서는, "안 되면 되게 한다"라는 정신을 무식하게 해석해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다. 그때까지 나는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없었는데, 면허도 없이 남의 차로 운전을 하고 다녔다. 그것도 미국에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교환학생 온 후배가 미국에 두고 온 닛산 알티마를 원없이 탔다. 엄마가 애원하다시피 말리셔서 몇 개월 후 미국 면허를 땄다. 한 번은 차가 견인됐는데 면허가 없어 인도네시아 친구의 면허증을 가짜로 제시했다. 여태 12년 운전하면서 한 번도 사고 낸 적이 없다. 면허가 없으니만큼 무조건 안전하게 운전해야 했던 초반 습관이 오히려 좋게 작용한 게 아닐까?

패기 어린 행동이 나쁜 결과를 낳은 경우도 있었다. 시험 전날 불량배들과 싸웠다가 경찰서에서 밤을 새운 것도 생각이 났다. 억울하게 휘말린 싸움이었다. 구체적인 장면은 드문드문하게만 기억 난다. 한창 권투를 재밌게 할 때였는데, 그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미팅 중에 동석한 여대생들에게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왔는데, "나이 먹고 뭐하는 짓이냐"고 한 마디 했다가 한 대 맞고 말았다. 그때부터 몸싸움이 시작됐고, 몇 분 후 경찰차가 왔을 때는 내가 때린 놈이 돼 있었다. 형사에게 상황을 잘 설명했지만 합의금은 내가 물어야 했고, 검사에게 불려가 조사 받은 것도 나였다. 지금이라면 모르는 사람과 절대로 시비 붙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다.

월터의 상상이 나의 현실로

이외에도 흥미진진한 경험을 적잖이 했다. 마카오에서 뛴 233m 높이의 번지점프, 세부에서 만져본 고래상어의 거칠한 피부, 발리에서 서핑하다 경험한 이안류, 그 밖에 죽을 때까지 나만 알고 있어야 할 더 아찔한 경험들...

현주소

어릴 때는 지금보다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겁은 없고, 욕심은 많았다. 지금은 반대다. 겁이 많고, 욕심이 적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지금의 나 같은 성격에서 어린 시절의 나 같은 성격으로 변모했다. 나는 주인공과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다. 문득 10년 전의 내가 조금 그립다. 그 때 내게는 세상이 소설책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반면 지금은 사막에 가깝다. 사막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고, 좋은 터가 있고, 나름의 화려함,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꽤 지루하고 답답하다. 10년 전 내게 이 영화가 재미 없었던 이유를 알겠다. 나는 그 때 이미 상상을 현실로 옮기고 있었다. 지금의 내게 이 영화가 꽤 재밌는 이유도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