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eun Paeng

크리스 밀러 - 칩워 (Part 2)

냉전 시기 최대 화두, 반도체

Chapter 7

1950년대 후반, 소련은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할 정도로 미국을 긴장시키는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에서는 2–4년 뒤처져 있었다. 소련은 반도체 기술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높은 활용도를 띠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스파이 작전으로 미국의 핵무기 기술을 따라잡은 것처럼 반도체 기술도 따라잡고자 했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흐루초프는 공산주의 옥수수 농장을 짓듯 밀어붙이면 반도체 또한 만들 수 있다는, 무지에서 비롯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로젠버그 스파이망의 일원이었던 조엘 바와 알프레드 사란트는 미국의 군사 전자 기술 기밀을 소련에 빼돌리다, 스파이망이 적발되자 소련으로 도피했다. 비록 빼돌린 것이 반도체 기술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가짜 신분으로 소련의 군사 전자 연구소를 이끌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1962년 연구소를 시찰하러 온 흐루쇼프에게 반도체 생산 "도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말하자면 소련식 실리콘밸리인 셈이다. 흐루초프의 승인을 얻어, 젤레노그라드라는 이름의 도시가 만들어졌다.

Chapter 8

소련의 베끼기 작전은 실패했다. 핵무기 제조에서 모방 전략이 통한 이유는 핵탄두 생산량이 냉전 전체를 통틀어 수만 개 수준으로 적은 편이라, 대량 생산 기술이 승부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핵탄두와 달리 품질과 순도를 지키는 것이 대량 생산의 핵심 변수였는데 소련에는 이 정도 기술이 없었다.

한편 반도체 기술 자체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칩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 수가 매해 두 배씩 늘었으니 말이다. 이런 분야에서 기술을 베끼는 것은 낡은 기술을 따라잡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Chapter 9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의도적으로 부흥시켰다. 냉전 시대에 일본에게 자국 반도체의 세일즈맨 역할을 맡기고자 한 것이다.

당시 모리타 아키오는 도쿄통신공업(Sony의 전신)의 공동 창업자였다. 첫 제품인 전기밥솥이 실패하고 테이프 리코더로 겨우 자리를 잡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트랜지스터의 잠재력을 일찍이 꿰뚫어보았다. 그리고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기업들이 그랬듯 AT&T로부터 트랜지스터 생산 라이센스를 구입했다.

Sony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공전의 히트를 이루었다. 첨단 기술 개발 경쟁은 미국 기업들에게 맡기고 소비자 관점에 집중하는 전략이었다. 모리타 아키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계획은 소비자에게 무슨 제품을 원하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품으로 소비자를 이끄는 것이다."

일반 소비자는 반도체의 잠재력을 알 턱이 없으니, Sony의 혁신 제품이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마치 마법과 같이 느껴질 것이라는 것이다. Sony 외에도 샤프전자가 휴대용 계산기로 큰 성공을 이뤘다.

정작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같은 미국 기업들은 고도의 반도체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본 기업들과 같은 소비자향 제품을 성공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가격과 마케팅에서 일본과의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과 미국의 공생 관계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반도체 소비자가 되었고, 미국은 일본의 전자제품 소비자가 되었다. 일본이 미국에서 라이센스한 트랜지스터 기술로 만든 제품들을 전세계에 판매했으니 트랜지스터 세일즈맨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셈이다.

미국 내에서는 일본 전자 산업의 성장이 자국 안보와 업계 이익을 해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일본을 미국 진영에 묶어두려는 냉전 전략이 우선이었다.

Chapter 10

앞서 반도체 대량 생산의 필요 조건으로 소형화, 안정화 등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 생산 비용을 빠뜨릴 수 없다. 반도체 생산 기지는 점점 미국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생산 책임자 찰리 스포크는 공장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후하게 부여하는 대신 군대처럼 엄중하게 다스리는 리더였다. 그리고 직원들을 가차없이 혹사시켰다.

그런 그가 홍콩으로 눈을 돌렸을 때, 시간당 인건비가 겨우 25센트로 미국의 1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도 찰리 스포크는 싱가포르의 인건비가 시간당 11센트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고 공장을 싱가포르에 세웠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리콴유라는 걸출한 정치인 치하에서 '경제 성장'을 최우선시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런 분위기로 인해 노조도 없었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로부터 수십 년 후이니, 사실상 미국의 반도체 산업이 세계화를 앞서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의 시간당 임금은 겨우 10센트였다.)

Chapter 11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있었던 베트남전은 한층 더 높은 기술력을 요구했다. 당시 공군 데이터 기준으로 폭탄은 평균 128미터나 목표물을 벗어난 곳에 떨어졌는데, 이래서는 땅에 있는 차량 한 대를 맞추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하던 웰든 워드는 반도체를 공군에 납품해서 정밀 타격 시스템에 혁신을 일으키고 싶었다. 많은 반도체 업체들이 공군에 비싼 미사일을 판매하고자 할 때, 그는 반도체가 단순하고, 사용하기 쉽고, 저렴해야 한다는 '패밀리카' 컨셉을 지향했다.

당시 공군에서는 M-117이라는 재래식 폭탄으로 베트남의 타인호아 다리를 폭격하고자 했으나, 638발을 투하했는데도 다리는 멀쩡했다. 공군은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 9개월이라는 짧은 시간과 9만 9천 달러라는 약간의 예산을 부여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M-117에 조종 날개와 렌즈 하나, 그리고 4분할된 실리콘 웨이퍼 조각을 부착했다. 목표물에서 반사된 레이저가 렌즈를 통과해 웨이퍼에 맺히는데, 폭탄이 경로를 벗어나면 네 구역 중 한쪽에 레이저가 더 많이 들어오고, 그 차이를 반도체 회로가 읽어들여 날개를 까딱거리는 유도 시스템이었다.

이 유도 키트는 Paveway라는 체계로 발전했고, 1972년 Paveway를 단 폭탄 24발이 마침내 다리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때쯤 이미 베트남전은 미국의 패배로 결정지어진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은 반도체를 탑재한 폭탄을 실험한 실험장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새로운 정밀 타격 체계가 전쟁과 국력의 정의를 얼마나 크게 바꿀지 예상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Chapter 12

1968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마크 셰퍼드와 모리스 창은 생산 기지 확보 차원에서 대만을 방문했다. 당시 대만의 경제부를 담당하고 있던 리궈딩 장관은 케임브리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조선소 경영도 맡았던 유능한 관료였다. 그는 미국의 반도체 기업을 대만에 유치하는 것이 투자와 일자리 고민을 해결할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설득해 제조 기지를 만들게끔 하였다.

이보다 더 큰 이유로 안보를 들 수 있다. 당시 대만은 장제스 치하에 있었는데, 중국은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였다. 중국의 침공 가능성은 대만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미국의 반도체 기업이 대만에 자리를 잡으면 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싱가포르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내셔널세미컨덕터를 불러들였고, 한국, 말레이시아, 홍콩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아시아 곳곳에 반도체 생산 기지가 들어섰고, 기존의 미군 기지와 안보 동맹 위에 실리콘 공급망이 얹히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동맹이 한층 단단해졌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는 반도체 및 반도체 관련 산업이 좌우할 정도로, 이 국가들은 반도체 산업에 많이 의존했다.

(Note: 호암자전을 보면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반도체를 고민하던 게 197X년인데, 위 내용과 시기가 겹친다.)

Chapter 13

마크 셰퍼드와 모리스 창이 대만을 처음 방문한 그 해에, 밥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페어차일드반도체의 대주주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퇴사하고 인텔을 차렸다. 이때가 1968년이었다. 인텔은 메모리칩과 로직칩 중 메모리칩에 사운을 걸기로 했다. 로직칩은 발주자마다 다르게 생긴 회로를 그려서 납품해야 하므로 생산 단가가 높은 반면, 메모리칩은 똑같이 생긴 칩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따라서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승부수가 된 것이 DRAM이다. DRAM은 IBM의 엔지니어 로버트 데나드가 발명한 것으로, 데이터를 칩 안에 저장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기존에는 마그네틱코어라는 자석에 저장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텔은 일본의 비지컴으로부터 계산기에 들어갈 로직칩 생산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이 프로젝트의 담당자였던 테드 호프는 컴퓨터 아키텍처 전문가로, 로직칩을 소프트웨어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았다. 이 관점은 매우 중요했다.

기존에는 각각의 로직칩에 설계가 그대로 회로로서 "박제"되었다. 그 칩 위에 별도의 소프트웨어는 필요가 없었다. 즉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아도 칩은 의도대로 멀쩡히 동작했다. 테드 호프의 생각은 이런 것이다.

만약 고객별 맞춤 동작을 '회로'가 하지 않고 소프트웨어가 하게 하면 어떨까? 로직칩 자체는 하나의 형태로 대량 생산하고 말이지.

기존에는 이런 생각이 실효성 없었다. 소프트웨어가 작은 칩 위에서 동작하려면 메모리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이 어땠는가. 메모리칩의 가격은 점점 떨어지고, 성능은 점점 높아질 것이 자명했다.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테드 호프는 46개의 범용 명령어만을 탑재한 로직칩, 일명 마이크로프로세서 또는 CPU를 구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칩은 1971년부터 4004라는 이름으로 팔리게 되었다.

(Note: 4004에서 8080으로, 8086으로 발전을 거듭해 우리에게 익숙한 x86까지 온 것이다. 46개의 범용 규칙은 저장, 더하기, 빼기 등이며, 로직 칩에 '프로그래밍' 한다는 것은 어셈블리어로 코드를 짠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Charles Petzold의 CODE 17장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등장으로 세상은 더더욱 빠른 속도로 바뀔 것이었다. 이제 누구나 CPU를 구매하고, 그 위에 어셈블리어를 짜넣으면 그 칩이 휴대용 계산기에 들어갈 수도 있고, 전자 사전에 들어갈 수도 있게 된 것이다.

Chater 14

윌리엄 페리는 일찍부터 군사용 무기에 집적회로가 탑재돼야 한다는 것을 간파한 인물이었다. 베트남전에 사용한 무기는 대부분 진공관을 탑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소형 집적회로로 바꾸면 정밀 타격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Chapter 11의 웰든 워드와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1977년, 이미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미국 국방부에는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소련은 핵전력에서 미국과 대등해졌고, 탱크와 병력 같은 재래식 전력에서는 압도적인 양적 우위에 있었다. 국방부 총괄평가국장 앤드류 마셜은 소련을 탱크 대 탱크로 이길 수는 없으니, 미국이 앞서 있는 반도체와 컴퓨터 기술로 소련의 수적 우위를 상쇄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페리는 이 구상을 받아들여, 모든 무기에 소형 집적회로를 탑재한다는 상쇄 전략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개발된 신무기가 바로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은 사전 탑재된 지도와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지형 간의 차이를 분석해 경로 이탈 후 스스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한참 전부터 존재했지만 연산력이라는 물리적 한계 때문에 실현이 안 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Chapter 13에서 다룬 인텔의 혁신, 1971년 4004 칩의 개발 같은 것이 군사 체계의 혁신에 영향을 크게 준 것이다.

페리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개별 유도무기도 강력하지만, 이것들이 정보를 공유하면 위력이 배가될 터였다. 그는 DARPA에 신형 센서, 유도 무기, 통신 장비를 하나로 통합하는 실험을 맡겼고, 이 프로그램이 Assault Breaker다. 서로 다른 무기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Orchestration의 구상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반도체 산업이 국방부에 의존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불과 10년 후부터는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따라잡는 것이 국방부의 최대 아젠다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반도체는 한 나라의 국방력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