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기로 아끼는 시간

by Dongeun Paeng
Jul 11, 2013 · 만 23세

오늘 친구들과 서울대입구역에서 모임이 있었다. 노래방에 가자고 불러내는 친구들의 연락에 반가움이 컸다.


2호선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무척 북적댔다. 서울대입구역은, 플랫폼에서 역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하나 뿐이어서 이용객이 특히 많은 출퇴근 시간에는 줄이 꽤 길다. 오늘도 다름없이 에스컬레이터 줄이 길어서, 재빨리 앞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내가 지하철에서 내릴 때에는 이미 줄이 꽤 길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어떤 아저씨 한 분이 맨 앞쪽의 사람들을 밀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이 보였다. 그 분이 줄을 끊고 들어온다고 해서 딱히 내가 시간을 많이 손해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분이 별로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그 아저씨가 줄을 제대로 섰다면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데까지 몇 분이나 늦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곧바로 줄의 맨 뒤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한참 뒤에 흰 옷을 입은 아가씨 한 분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저씨가 줄의 맨 뒤로 가서 기다렸다면 아마 흰 옷의 아가씨와 비슷한 시간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흥미가 생긴 나는 재빨리 초고화질 액정과 거북이 수명에 버금가는 탱크 배터리를 자랑하는 옵티머스G프로를 꺼내 스톱워치를 켰다. 새치기의 시간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곧 알게 될 것이었다.


아저씨가 교통카드를 찍은 순간부터 흰 옷의 아가씨가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걸린 시간은 13초. 놀라운 결과였다. 줄이 꽤 길었기에 최소 30초는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맨 앞으로 끼어든 아저씨와 맨 뒤의 아가씨 사이에는 나를 포함해 10명은 충분히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13초를 위해 새치기를 하고 새파랗게 어린 나에게 비웃음을 산 그 아저씨가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친구들이 있는 노래방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이런 실험을 하다니 정상이 확실히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 가지 계산을 더 해보았다. 만약 저 아저씨가 1년 동안 좀전의 새치기를 한다면 시간을 얼마나 아낄 수 있을까?


나는 재빨리 초고화질 액정과 거북이 수명에 버금가는 탱크 배터리를 자랑하는 옵티머스G프로를 꺼내 계산기를 켰다.


지하철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한 번씩, 그리고 출근길에 한 번 퇴근길에 한 번 해서 하루에 총 네 번. 오늘은 13초였지만 아저씨의 새치기를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일로 만들어드리기 위해 20초라고 가정. 하루에 아끼는 시간 80초. 아저씨의 새치기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연중무휴의 직장을 가정. 한 해에 아끼는 시간은 80 x 365 = 29,200초. 시간으로 환산하면 8시간 6분 정도. 대한민국 국민의 연평균 근로시간이 2,000시간을 넘으니까 아저씨가 1년 동안 새치기해서 벌어들인 8시간을 아저씨의 시급으로 환산하면 연봉 대비 0.4%의 추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새치기의 시간 가치를 더 늘려줄 수 있겠지만 내가 아저씨를 위해 가정한 여러가지 보수적인 조건들이 어느 정도 상쇄해줄 것이다.


1년 중 8시간 6분이 어느 정도 비중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1년 내내 새치기를 할 정도의 가치는 아닌 것 같다.


이번 계산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나도 나중에 마음이 급할 때, 새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참고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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