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임원들과 공유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서론
사무실 이사를 앞두고, 공간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글까지 쓰게 된 연유는 공간의 중요성을 최근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무실 레이아웃이 생산성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산성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변수들 중 사무실 인테리어가 가장 큰 비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사를 위해 사무실 인테리어를 검색하던 중, 몇몇 전문가들이 ‘공간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듣게 되었다. 그런데 ‘공간 디자인’은 생산성 향상보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개념이었다. 그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각, 배려, 철학을 표현하는 것이 공간이었다.
이쯤 되자 ‘인테리어’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가기가 쉽지 않아졌다. 공간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이상 조금이라도 고민이라는 것을 해야만 했다. 즉, 공간에 대해서도 ‘정신적 몸살’을 겪으라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어는 재택근무가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조직이다. 디어에서는 누구나, 언제나 재택근무를 할 수 있으며 이 때 필요한 행정 절차는 슬랙에 재택 여부를 남기는 것뿐이다.
자유로운 재택근무에도 불구하고, 디어 사무실은 대체로 북적이는 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즉 사무실이 주는 혜택이 무엇이기에 디어 팀원들은 자발적으로 사무실에 나오는 것일까?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사무실의 본질, 사무실의 존재 의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 사무실을 디자인할 때 이 본질과 존재 의의에 집중해야 한다.
팀원들은 왜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들여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일까? 우선 ‘공간’이 주는 가치의 종류를 나열해보자. 가령 ‘경의선 숲길’이나 ‘대강당’ 같은 공간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들을 빠짐없이 나열하면 어떤 목록이 생길지 보자는 것이다.
공간이 인간에게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협동, 관계, 교육, 영감, 자원, 집중, 휴식. 이 일곱 가지 요소를 “공간의 7대 가치”라고 하자.
이 글에서는 “공간의 7대 가치” 각각에 대해서, 그러한 가치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사무실 공간의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새로운 사무실이 제공해야 하는 가치들을 선택하여 나열하고, 그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본론
“공간의 7대 가치” 각각을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협동
- 본질: 협동의 본질은 소통이다. 시급한 일이라면 동시에 소통해야 하고, 시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글을 남겨놓은 후 회신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 글로 소통하는 데에는 같은 공간에 있을 필요가 없다. 반면 시급한 일인 경우에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좋으며, 글이 아니라 구두로 소통해야 한다.
-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시급한 소통을 반드시 사무실에서 할 필요는 없다. 게더, 줌, 슬랙 등으로 소통이 가능하다.
관계
- 본질: 관계의 본질은 친밀감, 공감대 등이다. 이는 비언어적 소통을 포함하므로,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다음으로는 통화가 좋다. 글로 소통하기만 해서는 친밀감이나 공감대 형성을 하기가 어렵다.
-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필수이다. 물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카페에서 만나도 된다. 그러나 1-on-1처럼 정기적인 만남은 카페에서 진행이 가능한 반면 평소에 업무를 하면서 쌓아나가는 친밀감과 공감대는 사무실에서만 제공이 가능하다. 가령 누군가의 생일, 누군가의 축하할 일, 누군가의 유머, 누군가의 슬픔 같은 것은 사무실에 함께 있다가 우연히 얻게 되는 친밀감과 공감대이다.
- 사무실 공간의 역할: 서로 눈을 바라보고 대화할 수 있는 환경 제공, 카페 벤치 같은 공간 마련, 떨어져 앉은 동료가 하는 이야기를 건너들을 수 있는 환경
교육
- 본질: 교육의 본질은 (1) 정보 전달, (2) 피드백이다. 교육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지식을 전달한 후,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인터넷 강의의 경우 지식이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디지털 형식으로 강의를 촬영/배포할 수 있으나, 업무 지식의 경우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서(즉 상황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대응하는 방식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복잡계 현상) 도제식 학습이 더 적절한 방법이다.
-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필수이다. 도제식 학습은 원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사무실 공간의 역할: 둘 또는 셋이 나란히 앉아서 같은 업무를 볼 수 있는 환경 (e.g. Pair Programming에 최적화된 환경)
영감
- 본질: 영감의 본질은 연결과 여유이다. 창의성은 관련이 거의 없는 것을 연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연결을 위해서는 사람들과 우연하고도 목적 없는 대화, 즉 수다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탈리아의 어느 카페가 철학자, 음악가, 소설가들의 모임 장소가 되어 다양한 생각의 탄생지가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여유가 없으면 창의성이 숨쉬지 못한다. 걷든, 자든, 명상을 하든 방해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때 갑자기 해결책이 떠오르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
-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여유를 주기 위해서는 필수가 아니지만, 연결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필수이다.
- 사무실 공간의 역할: 오다가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구조(만남의 광장)를 만들어주는 한편, 조용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자원
- 본질: 자원으로서의 공간은 어떤 의미일까. 업무에 필요한 자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회사에 가면 좀 더 큰 모니터, 시원한 에어컨, 맛있는 음식들을 제공 받으며 일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자원은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업무에 모니터가 필요하다면 그 모니터가 반드시 회사에 있을 필요는 없다. 간식은 집에서 시켜먹을 수 있도록 법인카드를 제공하면 된다. 즉 자원이 필요해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은 자원의 진정한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100% 확신하진 않지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중
- 본질: 집중의 본질은 단절이다. 개방과 집중은 병행할 수 없다. 집중이 필요할 때는 외부의 소리와 방해를 온전히 차단해야 한다. 때로는 빛마저도 방해가 될 수 있다. 성숙한 사람은 집중이 필요할 때 외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한편 소리와 빛이 차단된 공간을 찾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사무실이 이런 공간의 역할을 해준다면 집중을 원하는 팀원들에게 유의미한 가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집중 외에, 팀의 집중도 필요하다. 팀의 집중을 위해서는 선택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차단된 공간이 필요하다. 즉 회의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때는 빛까지 차단하는 것의 부작용이 있다. 밀실 회의라는 느낌이 조직에 신뢰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실에는 필요 시에만 시야를 폐쇄할 수 있도록 커튼이 있어야 한다.
-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사무실이 아니면 제공할 수 없기에 필수이다.
- 사무실 공간의 역할: 집중을 위해 빛과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휴식
- 본질: 휴식의 본질도 여유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목표와 목적을 잠시 잊고 멍을 때리거나 동료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휴식이다. 내향적 성향의 팀원은 조용히 생각할 장소 또는 산책로가 필요할 것이고, 외향적 성향의 팀원은 수다를 떨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무실이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산책을 원하는 팀원은 회사 주변을 혼자 걸으면 되고, 수다를 떨면서 휴식을 취할 때도 꼭 사무실이 아니어도 된다. 이런 점에서 ‘연결을 강제로 만들어내야 하는’ 영감 목적의 사무실 공간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 사무실 공간이 필수인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사무실 공간의 역할: 외출이 쉬운 구조여야 한다. 산책을 하고 싶은데 엘리베이터 대기 시간이 5분이나 걸린다면 포기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다음으로는 새로운 사무실이 제공해야 하는 가치들을 선택하여 나열하고 그 방법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위 7대 가치 중 사무실 공간이 있을 때 유지/강화가 되는 가치들은 다음과 같다. 관계, 교육, 연결(영감을 구성하는 여유와 연결 중 후자), 집중. 나머지 가치들은 팀원 각자가 온라인 자원을 통해서 또는 카페, 산책로 등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가치들이라고 판단하였다.
한편 사무실 공간을 필요로 하는 네 개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무실은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업무 공간, 휴게 공간, 집중 공간.
업무 공간은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관계 형성을 위한 카페 구조의 좌석들.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 교육 목적으로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 가로로 넓은 모니터. 같은 팀 동료와 일하면서도 다른 팀 동료들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거리 및 배치. 충분히 많은 회의실과, 회의실 내부의 커튼.
휴게 공간은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사무실 내 어느 공간을 가든 거쳐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존재하는 광장 형태의 공간. 코엑스에서 별마당이 갖는 역할과 비슷하다. 충분히 많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원하면 바닥이든, 벤치든, 계단이든, 의자든, 쿠션이든 앉아서 대화가 가능하다.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공원 같은 느낌.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음료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려면 휴게 공간에 오도록 유도해야 한다.
집중 공간은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방. 창문이 없어서 원한다면 조명을 끄고 빛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집중의 본질에서 벗어나 컴퓨터를 너무 오래 사용하지 못하도록 콘센트를 가려야 한다. 의자와 시계 정도만 있으면 될 것이다.
결론
이로써 새로운 사무실 공간이 제공해야 할 가치와, 그것을 제공할 방법을 적었다. 공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과제들이 많아 이건희 회장의 주문처럼 ‘정신적 몸살’이 걸릴 정도로 고민을 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이 글을 통해 사무실 공간이 존재해야 하는 목적과, 그 목적에 부합하는 공간만을 남기고 나머지 공간(예를 들어 도서관)은 제거해도 괜찮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바, 관련자들이 함께 고민해보기를 제안한다.
NEXT POST
노인들을 보며
Dec 10, 2021 · 만 31세
국밥을 맛있게 말아드시는 백발의 할아버지들을 TV에서 보았습니다.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