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의 한 기사에서 아래 내용을 읽었다.
[T]hey have to be “woke but not too woke, interesting but not too scholarly, not too expensive but not too cheap”. Others blame the internet: a premium is now put on creating large, vibrant canvases that look good on social media.
요즘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작품, SNS에서 공유할 만한 작품이 잘 팔린다는 것이다.
최근 미술 추세에 대한 비판이겠으나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미술은 늘 주변 환경을 잣대로 가치 평가됐다.
물론 환경에 따라 가치가 변하는 것은 미술 밖에도 많다. 그런데 미술은 예술이다 보니, 왠지 각 작품이 그 자체로 자기 완성적인 아름다움을 갖춰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미술 작품 가치는 환경에 종속된다. 과거에 주목 받지 않던 작품이 뒤늦게 주목 받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그 증거다.
그런 점에서 맨 위 기사 내용은 비판이라기보단 현실 묘사로 이해하는 게 옳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선을 넘지 않으면서, 그 선에 못 미치지 않는 작품을 만드는 센스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상업성 없는 미술은 특별한 이유 없다면 좋게 평가 받기 힘들다. 왜냐면 우리 사회는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고 있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작품은 상업성 큰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팔리려면 대중의 눈높이와 취향을 센스 있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진짜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예술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이다‘라는 평가를 못 받는다. 오히려 ’이게 뭔 뜻인지 알 수가 없다‘는 얘기를 들을 뿐이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어려워야, ’깊이 있고 난해하나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불릴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렵다고 하는 건 ’쉬운 것들 중 어려운 편‘인 것이고, 우리가 심오하다고 하는 건 ’얕은 것들 중 깊은 편‘인 것이다. 이 현상은 미술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사업으로 일반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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