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혁명의 구조>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혁명은 (중략)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한 진보가 아니다. 이것은 한때 잘 작동했지만, 더 이상 새로운 문제를 잘 다루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진보이다."
십 년 전 첫 직장에서 퇴사할 때, 그것은 이직이 아니었다. 갈 곳도 목표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고, 이직에 쓸 만한 경력도 없었다.
동기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퇴사하는 건 좋은데, 어디 갈지 결정은 해두고 나가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나는 방황이 두렵지 않았다. 여태껏 늘 그랬다. 갇힌 자리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작이었다.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벗어나는 몸부림 자체로 진보이며, 그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방황의 시기에만 보이는 길이, 방향이 있다. 이 길은 기존의 세계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길들이다.
미리 정해둔 목표가 있을 때에만 떠날 수 있다면, 첫 걸음 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다.
떠남을 생각할 때에는 어디를 향할지가 아니라, 왜 떠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