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더 가치 있게 (feat. AI)
내 생각을 쓰는 것에서 가치 있는 글을 쓰는 것으로
배경
어느 날 먼 지인이 자기 블로그 글을 읽어보라며 추천했다. 그 글을 읽기 전에, 그 지인의 다른 글들을 둘러보았다. 얼핏 읽어봐도 상당한 지식과 내공이 엿보였다. 게다가 필력까지.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문득 '내 블로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과연 독자에게 닿고 있을까? 그 독자가 나 자신이든, 우연히 이곳을 들른 사람이든.
이제까지 쌓인 글들을 싹 한 번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글이 꽤 많았다. 700개가 넘는 글이 있었다. 이걸 어쩐다.
이런 작업에 특화된 친구가 있다.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친구다. 그를 부르기로 했다. 바로 AI다.
전략
다음 순서로 진행했다.
- AI를 활용해 모든 글의 매력도를 평가하고 점수 매기기
- 점수가 낮은 글은 버리거나 다시 쓰기
- 블로그 글의 DB 저장 형식을 html에서 마크다운으로 바꾸기
(3번을 진행하다가 그만 일이 커져버렸다. 결국 블로그를 새단장 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 이야기는 "AI 이후 인간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다음 글에서 풀어볼까 한다.)
세부 절차
전략의 각 단계는 다음 절차로 진행했다.
1) 모든 글을 마크다운 형식으로 정리하기
요즘 많은 블로그가 마크다운(md) 에디터를 쓰는 것에 반해, 내 블로그는 Quill이라는 에디터를 사용한다. 네이버 블로그 같은 에디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에디터를 사용하면, 내가 쓴 글이 DB에 html 형태로 저장된다. 이 에디터의 장점은 마크다운과 달리 글자 색깔, 폰트 등을 자유롭게 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AI는 html 문서보다 마크다운 문서를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한다. 따라서 모든 글을 마크다운 문서로 변환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는 파이썬 스크립트를 이용했는데, GPT-5.2가 많은 도움을 줬다. 파이썬 스크립트 작성 시 주의할 점을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다.
- 코드 블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 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 LaTex/KaTex 수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외에도 유튜브 영상을 삽입했거나, 구두점 목록이 여러 단계로 깊어지는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경우가 없었다.
한편 GPT가 발견하지 못한 특이사항도 있었다. 만약 문장의 시작점에 숫자와 구두점이 들어가면, 마크다운 문서에서는 무조건 숫자 목록으로 인식한다. 이게 상당한 불편을 낳았다.
예를 들어 어떤 문장이 "2018. 10. 19.에 쓴 글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면, 마크다운에서는 이 문장이 2018번째 숫자 목록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모두 "2018-10-19에 쓴 글에 따르면..."으로 고쳐줘야 했다.
2) AI 에이전트 제작
다음 단계는 각 글에 점수를 붙이는 것이다. 제일 처음 한 것은 역시 GPT-5.2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매력적인 블로그 글의 속성과 가중치 알려줘.
이렇게 물어보면 GPT가 세 가지 속성과 각각의 중요성을 숫자로 제공한다. 그 다음은 Claude Code가 나설 차례다. Claude Code는 agentic AI의 선두 주자다. Agentic AI는 여러 종류의 작업을 쉬지 않고 오랫동안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앞서 GPT가 알려준 평가 기준을 Claude의 agent에게 주면서, 모든 글을 점수 매겨달라고 부탁했다. 이 때 가이드를 자세히 주지 않았는데, 이게 나중에 품질 이슈로 이어졌다. 가이드를 자세히 줬다면 token이 부족해지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점수가 내 직관과 일치하지 않았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글을 몇 개 읽어보았는데, 딱히 잘 쓴 글이 아니었다.
Claude의 연산 능력을 온라인으로 빌려 쓰는 환경의 한계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프라인에서도 작업 가능한,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돈이 들지 않는, 로컬 AI를 활용하기로 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피곤한 작업을 시도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공부할 게 많아서다. 지금은 다르다. 공부가 필요 없다. 다음 글에서 얘기하겠지만 AI를 사용하면 기술 공부가 필요 없다. 누군가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아쉬운 얘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분야에 애착 없이, 공부 안 하고 혜택만 누리려는 사람이 하는 얘기가 제일 냉정한 법이다.
쿤(Kuhn)식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3) 로컬 AI 활용하기
여기부터는 나도 그 원리를 잘 모르는 내용이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 자동차의 원리를 모두 이해하고 하는 것이 아니듯, 최소한의 사용법만 인지한 채로 작업했다. 만약 F1 레이싱카나 헬리콥터처럼 사용법이 어려웠다면 공부할 시간이 아까워 나중을 기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법이 일반 승용차만큼 쉬웠다.
우선 GPT-5.2가 작성해준 간단한 파이썬 스크립트를 사용하면 된다. 파이썬 라이브러리 중 torch와 transformers만 있으면 Hugging Face에서 제공하는 여러 모델을 무료로,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점수를 매기고 나면 아래 형식으로 정리가 된다.
{"id": "post_001", "path": "converted_md/post_001.md", "score": 65, "verdict": "주제는 흥미로운데 구조와 구체성이 부족해 매력도가 제한적입니다.", "strengths": ["흥미로운 주제 선정", "심리학적 사고를 자극하는 내용"], "weaknesses": ["구조가 단조로워 가독성이 낮음", "구체적인 예시나 데이터 부족"], "quick_fixes": ["소제목을 추가하여 구조를 명확히 함", "실제 사례나 데이터를 포함하여 실용성을 높임", "짧은 문장과 문단으로 흐름을 개선함"], "risk_flags": []}
{"id": "post_002", "path": "converted_md/post_002.md", "score": null, "verdict": "SKIPPED_TOO_SHORT", "strengths": [], "weaknesses": [], "quick_fixes": [], "risk_flags": []}
...
4) 글 다시 쓰기
이 과정은 뻔하다. 점수가 낮은 글들, 혹은 너무 짧아서 평가가 안 된 글들은 버리거나 다시 쓰는 것이다. 이 작업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현재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5) 블로그를 마크다운 기반으로 바꾸기
이번에 작업해보니, 내 글을 AI에게 맡기면 더 많은 재밌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동 번역, 요약, 챗봇, 검색, 실시간 첨삭 등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더 늦기 전에 마크다운 기반의 블로그로 탈바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SvelteKit 기반으로 짠 기존 소스코드를 Claude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이 블로그를 마크다운 기반으로 바꿀 건데, 마이그레이션을 담당할 AI에게 전달하기 위한 설계 문서를 꼼꼼하게 작성해줘. 근데 이제... 댓글, 좋아요, 내가 읽은 글 같은 기능을 곁들인.
이 작은 욕심(?)이 일이 크게 키우고 말았다. 물론 내가 키운 일을 AI가 잘 수습 해줘서, 시간이 많이 쓰였다거나 고생한 건 아니다. 오히려 많이 배웠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나만의 시각을 조금 더 굳힐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해보려고 한다.
끝으로
AI가 매겨놓은 점수를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글을 대충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만 짧은 게 아니라 생각도 짧았다.
사업을 하며 뭔가 대단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써놓은 글인데, 잠시 생각해보면 "그런가?" 싶은 글이 많았다. 그런 글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모두 지워버렸다.
오히려 예전에 쓴 글은 유치하지만 재미가 있었다. 틀린 생각일지언정 나름 오래 사색하고 쓴 글이어서 읽는 맛이 있었다. 어느새 나는 과거의 나를 타자화 하고 있었다. 내가 쓴 글이라는 전제가 개입되기도 전에, 그 글 자체의 재미와 질이 내 감정과 생각을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블로그 글은 정성을 담아서 써야만 한다. 설령 나만 보는 글이라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나는 지금 내가 쓴 글을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평가할 것이며, 미흡한 글을 단칼에 죽여버릴 독재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