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eun Paeng

자유와 책임

책임은 자유를 억제한다. 그렇다고 자유를 위해 책임을 내려놓을 것인가?

우린 모두 자유를 갈구한다

사람은 대부분 자유를 원한다. 신생아 시기를 지나고부터는 자유를 최우선으로 둔다. 배가 고픈 와중에도 아기들은 밥보다 자유를 원한다. 맛이 없는 음식을 주면 먹지 않거나, 억지로 먹으며 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배가 고프면 맛없는 것도 먹게 되니까, 자유보다 식욕이 앞선 것 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유를 포기하고 밥을 먹었다는 것은 갈망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이 더 쉽게 저지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자유를 더 갈망하면서도, 자유를 더 쉽게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가치를 포기하는 속도는 갈망의 크기보다는 그것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대립 가치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유는 그것을 억제하는 대립자인 '책임'과 쌍을 이룬다. 반면 일반적인 욕구(식욕, 수면욕)는 그러한 천적이 없다.

자유는 '선택'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자유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미스테리다. 동물에게도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을까? 정황 상 아닌 것 같다. 만약 동물에게 인간만큼의 갈망이 있었다면, 전 지구적인 폭동이 일어났어야 마땅하다. 개들은 주인을 물어뜯고, 소들은 외양간에서 도망치고, 동물원의 맹수들은 사육사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동물 대부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산다.

그렇게 보면, 어쩌면 자유를 갈구하려면 최소한의 지능을 갖춰야 하는 것 같다. 자유는 곧 선택이기 때문이고, 선택을 하려면 선택지를 비교할 만한 지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선택지를 비교하려면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고, 상상은 고지능을 요구한다.

돌고래는 수족관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를 제외하고는 아무 선택권도 남지 않았을 때,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자유를 택한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연상시킨다. 안톤 쉬거가 칼라 진에게 동전 던지기를 제안하는 장면도 자유는 곧 선택권이며, 선택권이 생존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는 이미 선택이라는 행위를 내포한다.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유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의 천적, 책임

자유가 지상 과제임에도, "당신은 자유로운가요?"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할 만한 사람은 손에 꼽는다. 책임이 자유를 속박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의미한다. 책임은 자유를 억제한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오로지 책임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를 정의하려면 책임을 먼저 정의해야 한다.

우리가 자유를 희생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누군가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든, 타인에 대한 책임이든.

책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 하나로 환원해보자면 유전자의 명령이 아닐까?

유전자는 운반자인 자기 자신뿐 아니라 혈연에 대한 책임까지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탁월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혈연이 아닌 타인에 대한 책임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한 가지 가설은 자본주의 사회 체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책임의 확장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리카르도가 말한 비교 우위에 기반한 물물 교환이 활발히 일어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환이 발생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는 역할 수행이 전제 되어야 한다.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나만 책임지면 된다. 그러나 내가 우유 짜는 사람이고, 옆 동네 철수가 빵 굽는 사람이면, 나는 그의 우유를 책임지고 그는 나의 빵을 책임지는 것이다. 서로 책임지지 않으면 자급자족 사회로 '퇴보'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책임은 특이한 현상으로 이어진다. 나 대신 우유를 짤 사람이 없으면, 나는 아파도 휴가를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철수에게는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혹은 나를 대신해 우유를 짜줄 영희가 있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영희가 아플 때를 대비해 내가 있어야 한다. 어느 경우라도 나는 부재(不在)할 권리가 없다.

달가운 책임, 달갑지 않은 책임

잠시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 내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의 책임 범위가 된다. 내 부재에 영향을 받는 타인들이 내 책임 범위다. 이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보자. 내 존재를 아끼는 타인과 그렇지 않은 타인으로. 사람은 두 종류의 타인 모두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후자에 대해서는 달갑지 않다. 내가 좀팽이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첫째 부류는 내가 기꺼이 책임 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가족은 나를 애타게 찾고, 나와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내게 의존한다. 나는 그들을 지켜야 하므로 부재할 수 없다. 나도 그들 앞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

한편 나와 상업적 관계만을 갖는 타인들은 경제적 목적이 있을 때만 내게 의존한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유일한 이유는 '돈'이다. 내 부재는 그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아끼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척박한 의존 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나도 누군가의 자유를 같은 방식으로 해치고 있다.

시스템이 책임을 줄여준다

이런 상황을 해소할 방법은 무엇인가?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모든 타인을 애정으로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주일 설교로 만들진 말자. 현실적인 방법은 책임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버리고 자급자족 사회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분업과 전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최대한 덜 기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시스템"이다.

대기업은 이 부분의 실력자다. 대기업에선 개인에게 책임이 쏠리지 않도록 정교한 시스템을 만든다. 대표이사도 여러 명이고, 주식도 분산되어 있다.

직원들은 자신이 교체 가능한 부품에 불과하다며 불안해 하곤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덕분에 그들은 반반차, 반차, 연차, 출산 휴가를 비롯해 다양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세스 고딘의 <린치핀>은 이런 시스템을 극복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독자에게 "교체할 수 없는 부품이 돼라"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 조언은 반쪽짜리 조언이다. 경고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교체할 수 없는 부품이 되려면, 부재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자유의 양면성이다. 자유는 책임과 양립할 수 없다. '내게 막중한 책임을 달라'고 주장하려면 자유를 포기할 결단이 필요하다.

조직장의 책임

나는 린치핀이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책임을 싫어한다. 나는 고립을 좋아한다. 성향이 그렇다. 하지만 인생이 바라는 대로만 나아가진 않는다. 나는 대표이다.

우리 회사에서, 내가 책임지는 사람들 중 위의 "첫 번째 분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직감적으로 예상해보건대 높진 않을 것 같다. 사장의 부재는 모든 직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직원들이 사장을 인간적으로 아끼고 가까이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전에 몸담았던 직장 생활들을 돌이켜보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회사의 수장을 존경했지만, 인간적으로 사랑하기엔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내가 탄 배의 선장이었다. 그는 나를 책임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임을 체감하거나 음미하며 감사한 적이 없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죄송한 마음이 사무친다.

이제 내가 그 수장이 되었다. 나는 예전 회사 사장님 같은 거목이 될 수 없다. 그럴 재간이 없다. 그는 창업 후 수십년 간 한 번도 길게 자리 비운 적이 없었다.

나는 거목 대신 시스템으로 내 작은 마을을 지탱하고자 한다. 내 역할을 줄이고, 내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다. 정교하게 설계하고, 오랜 시간 구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