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끝줄소년 플롯 회고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들어가며
장항준 감독의 조언을 우연히 보았다. 이야기를 잘 쓰고 싶다면 감상한 영화의 줄거리를 복기해 보라는 것이다. 따분한 작업이지만 반복하면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기억나는 대로 이 드라마의 플롯을 회고해 보려고 한다. 몇 주 지난 일이라 기억이 온전하진 않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서 채워 넣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야기를 잘 쓰고 싶은걸까? 오래전부터 내 글이 생동하길 바랐다. 맛과 향을 더하고 싶었다. 이야기가 좋으면 문체가 투박해도 독자를 끌어당긴다고 한다.
워런 버핏이 대중 앞에서 말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처럼, 나는 매력적인 글 쓰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럼 이제 맨끝줄소년 플롯을 복기해 보자.
주인공: 허문오, 이강
허문오는 문학 교수다. 젊은 시절 소설을 한 편 써냈으나 이후 슬럼프에 빠져 수십 년이 지나도록 두 번째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의 좌절감은 학생들의 과제를 혹평하는 괴팍한 방식으로 드러날 정도로 강렬하다.
그런 문오가 자기 수업에서 이강이 제출한 과제(초단편 소설)를 보고 간만의 흥미를 느낀다. 이강은 친구 엄마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를 몰입감 있게 풀어내, 문오로 하여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참지 못하게 만든다.
문오가 선을 넘다
문오는 이강을 따로 불러 문학 수업을 받으라고 한다. 하지만 이강은 거절한다. 이강이 친구 김세윤의 집에 얹혀 살아야 이야깃거리가 떠오르는데, 그러려면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강이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바로 문오가 시험 문제를 빼내는 것이다. 문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강을 미친놈 취급하지만, 이강이 그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과제 제출을 중단하자 결국 공대 교수실에 들어가 몰래 시험지를 빼낸다. 막상 탈선을 저지르자 문오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문오의 오랜 질투
문오의 작품 활동 중단에 쐐기를 박은 오래전 사건이 있었다. 바로 친구 김수훈의 독설이다. 김수훈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문오는 김수훈을 심하게 질투하고 있다. 특히 김수훈의 아내 안은주는 문오가 짝사랑했던 대학교 후배였다. 문오의 질투와 연모에 대해 알게 된 아내는 화를 억누른다.
문학 수업 시작하다
이강이 김세윤의 집으로 들어가고, 문학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수업은 문오의 집에서 진행됐는데, 이강은 문오의 아내를 칭찬하면서, 은근하게 그녀의 욕구 불만을 자극한다. 한편 문오는 이강에게 김세윤 가족을 관찰하고 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하라고 지시한다.
수업을 중단하다
김세윤의 집에는 세윤 엄마, 세윤 아빠, 가정부 누나, 세윤 누나가 있다. 이강은 세윤 아빠와 세윤 엄마의 성생활 및 가정부 누나와 세윤 아빠의 수상한 정황에 집중한다. 문오는 확실하지 않은 일을 단정하는 것은 소설가로서 나쁜 태도라며 엄하게 꾸짖는다. 문오에게 이강은 정상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후에도 이강은 가정부 누나에게 도둑 누명을 씌우는 등,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른다. 이를 계기로 문오는 이강에게 분개하고 수업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는다.
우연한 사고가 상황을 반전시키다
문오가 수업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강이 문오를 어느 호텔 앞으로 불러낸다. 이강은 세윤 아빠가 가정부 누나와 호텔에 들어갔다며 흥분한 채 문오에게 얘기한다. 문오는 이강의 도를 넘은 행동에 화를 내며 이제 수업은 끝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때, 차도 맞은 편에서 차량이 젊은 여자를 치는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이강은 놀란 표정으로 차에 치인 여자가 바로 가정부 누나라고 한다. 문오는 어안이 벙벙하다. 이때 이강은 길 건너에 있는 김수훈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세윤이 아빠다"라고 한다. 문오는 김세윤 아빠가 바로 김수훈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이내 문오의 생각이 안은주에게까지 미치고, 김수훈이 안은주를 두고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문오의 집착
문오는 수업을 그만두자는 이야기를 없던 것으로 하고, 김세윤네 가족을 계속 관찰하라고 이강을 닦달한다. 특히, 이번 교통사고 이면에 숨은 진실을 파헤치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어느새 문오는 자신이 혐오하던 행동과 태도를 이강에게 주입하고 있다. 이를 테면 미행과 속단 같은.
문오의 지시에 따라 이강은 문오에게 새로운 정보를 계속 가져다주는데, 그 정보들은 김수훈이 바람을 피우고 있던 게 아니라, 가정부 누나를 의도적으로 살인한 것이었다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강은 가정부 누나의 친언니가 죽었으며, 그 언니가 무명 작가로서 죽기 전에 쓴 소설을 김수훈이 훔쳐 써낸 것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사실을 문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가정부 누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수훈이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알려준다.
문오는 김수훈의 추잡한 행위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김수훈의 소설이 표절이었다는 사실에서 질투가 해소되는 희열을 느낀다.
클라이맥스
문오는 이 모든 사실을 담은 고발 소설을 하룻밤새 써 내려간다. 수십 년간 막혀 있던 창작의 길이 뻥 뚫린 듯, 아침이 밝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소설을 쓴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이강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다. 전화를 걸자 이강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느냐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간밤중에 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강은 김수훈의 사실이 김세윤에게 들통났고, 모든 것을 잃게 된 김수훈이 이성을 잃고 아들 김세윤과 아내 안은주를 죽인 후 집에 불을 지르려 한다고 알린다. 그 소식을 들은 문오는 다급히 차를 타고 김수훈의 집으로 질주한다.
문오는 김수훈의 집에 도착해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린다. 문오의 신고로 119 소방대원들도 이미 집앞에 도착해 있다.
반전이 드러나다
그런데 집에는 화재의 흔적이 없고, 집안도 고요하다. 119 대원들은 허탕을 쳤다는 표정이다. 문오는 소방대원들에게 문을 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문오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본다.
이때 김수훈의 가족이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의아한 하는 표정으로 허문오와 소방대원들을 쳐다본다. 문오는 상황을 깨닫고 멍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운전한다. 그러다 집 앞에서 이강을 마주치고는 소리를 지르며 쫓아가 보지만 잡지 못한다.
집에 들어가자 아내가 짐을 싸 들고 집을 나서고 있다. 침대가 헝클어져 있고 거실 식탁에는 와인과 치즈 플래터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문오가 없는 사이 아내는 이강과 정사를 나눈 듯하다. 문오는 아내에게 화를 내지만, 아내가 이혼하겠다고 하자 절박한 목소리로 아내를 붙잡는다. 아내는 문오를 차갑게 내친다.
문오가 서재에 올려둔 두 번째 소설은 이강이 훔쳐 가버렸다. 문오는 소설을 찾으며 울부짖는다.
문오가 비극을 맞이하다
이튿날 대학교 커뮤니티에 문오의 소설이 올라온다. 이강은 문오의 질투가 이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다며, 문오가 프로그래밍 대회 문제를 훔치고 이강을 김세윤의 집에 잠입시켰다는 내용도 글에 포함한다. 문오는 징계위원회에 불려가고, 교수 자리를 박탈당한다.
배경을 알게 되다
문오는 이강에게 대체 왜 자신을 속였는지 묻는다. 이강은 오래 전 자신이 고아원에 있을 때 문오에게 상처받은 일을 밝힌다. 이강은 시무룩한 아이였다. 고아원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슬펐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오의 아내가 고아원으로 봉사를 가면서, 문오를 데리고 갔다. 문오는 이강에게 오리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라고 권유한다. 이강은 오리 가족에 자기 이야기를 대입하면서 닫힌 마음을 연다. 문오는 차분히 듣는다. 이강은 그 시간이 무척 좋았는지, 문오 부부가 고아원을 떠날 때 정문까지 몰래 따라온다. 그러다 문오의 말을 엿듣게 된다. 그 내용은 바로 이강 가족의 이야기가 평범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열린 이강의 마음은 다시 굳게 닫히고, 이강은 복수를 꿈꾼다. 문오는 이강의 설명을 듣고 실성한 듯 웃다가 운다.
이야기의 끝
시간이 흘러 문오는 책방 카운터 일을 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어느 날 책방에 이강이 찾아온다. 문오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이강을 쳐다보기만 한다. 이강은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며 문오를 자극한다. 문오는 이강을 용서할 수 없으면서도 그 이야기에 벌써 호기심이 동하는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것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다.
회고
플롯을 복기하는 건 꽤 재밌는 작업이었다. 시간이 없어 대충대충 기억나는 대로 썼는데도 900단어쯤 된다. 퇴고하면 반복하면 훨씬 나아질 것 같지만 그럴 여유까진 없다.
드라마는 위의 단선적인 플롯 위에 작은 이야기들을 더한다. 세윤과 세윤 누나의 갈등이라든지, 문오의 첫 번째 소설 내용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메인 플롯에 잘 스며들지 않을 뿐더러, 전체 줄거리의 개연성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않는다. 즉, 그 이야기들이 없어도 플롯 진행에 거의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복기할 때도 이 작은 이야기들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거나, 딱히 쓸 필요를 못 느꼈다. 이런 이야기들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떨어트렸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드라마를 보면서 이야기가 왠지 허술하다고 느꼈는데,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플롯을 복기함으로써 이런 문제가 뚜렷해졌다. 장항준 감독의 말이 정말 값진 조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