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라는 단어를 정말 쓰기 싫었지만, 포기한 것이 맞다.
시합이 두려워서 포기하거나 준비 과정이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쓰자면 시합 출전의 의도가 선하지 않았다는 점, 즉 출발점에서부터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내가 무에타이 시합에 재출전하게 된 이유는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지난 시합에서 패배한 것도 그렇고, 원래 나의 신체가 약함을 극복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타인과 싸워서 지지 않는 실력을 갖고 싶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더 쉽게 때려눕힐 수 있는 강인함이 나의 목적이었다.
내가 그저 자신의 원(願)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 때는 그 의도가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자기 약함을 극복하려는 자세는 좋은 것이고, 남자가 무술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장점이면 장점이지 단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 나는 상대방의 뼈를 부수거나 기절시키기 위한 고민과 훈련을 반복했고, 스파링을 하면서도 상대가 아플 만한 곳을 때리는 데 집중했다. 그것이 무에타이에서는 '잘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 성격답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사실 시합에 나가면 낙승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 하는 것처럼 감량을 계속해나가고, 운동도 하고, 스파링도 적당히 하다가 시합에 나가면 내가 이길 가능성이 무척 크다. 상대는 나보다 훈련 기간도 짧고 체중 감량 강도도 약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상대를 이겨서 얻는 성취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 무술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심신을 강하게 단련하기 위해서, 그리고 실력이 늘수록 겸손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시합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죽일 듯이 패기 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검증하는 단계에서 준비된 사람끼리 프로답게 실력을 발휘하는 장(場)이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무에타이 시합을 준비하는 이유는 둘 다 아니었다. 내 목표는 시합에 나가서 상대방을 이기고 트로피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그 무술의 바탕이 되는 마음가짐에 대한 공부도 아니고, 오랜 시간 쌓아올린 무술 실력도 아니었다.
시합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과 기술만이 필요했다. 내 경우에는 상대방도 초보자임을 감안해서 니킥으로 갈빗대를 부러뜨리는 게 주무기였다. 그렇게 해서 시합을 이기고, 내 인생에서 다시는 무에타이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일을 하는 나의 의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한 일인가. 그것이 선한 일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아니면 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내 마음을 더럽히는 일인가.
'의도'가 너무나 중요하다. 같은 무에타이 선수라도 의도가 바로 선 사람은 끝까지 갈 수 있다. 우리 관장님(One FC 김대환 선수)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셔서, 매 시합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인터뷰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증거한다.
나는 같은 운동을 하면서도 그 안에 좋은 '의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 시간이 이렇게 괴로웠던 것 같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 물어보고 결정해야겠다. '주님, 내가 이거 할까요, 말까요? 하라시면 하고, 말라시면 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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