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센 회사와 Meritocracy

by Dongeun Paeng
Mar 17, 2015 · 만 25세

조금 전까지 나는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지하철을 타고 터미널에 가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역산을 하면 몇 시에 집을 나서야 하고, 몇 시에 터미널에 도착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런 단순한 사고는 직장에서뿐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학교나 학원에 가기 전에 하는 일이다.


문득 예전 직장 생각이 났다.

그 단순한 역산에 관한 가르침을 한 해 동안 20번 이상 들은 것 같다.

"동은 씨, 프로젝트가 주어졌을 때는 말이야, 역산을 해보는 거야. 자, 행사가 이 때니까, blah blah..."


건방진 얘기일지 모르지만 아는 걸 듣고 또 들으려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내 스스로 바보가 된 느낌도 많이 받았다.

왜 같은 말을 계속 하는 걸까. 에릭 슈미트에 따르면 사람의 뇌는 1초 동안 7가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다는데 이 분들은 1년 동안 나에게 새로 가르쳐줄만한 지식이 하나도 업데이트 되지 않는 건가?


한 마디로 지적유희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어제 중동에서 생긴 정치적 사건이 국제 선물거래 시장에 미친 영향이라든지, Uber의 국내 진출이 서울시와 어떤 갈등을 겪고 있는지, 동남아시아 부동산 시장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등 challenging & intriguing한 얘깃거리가 정말 많다.


그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모든 시간 동안 내가 뭔가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 그렇게 돼버렸을까. 그 분들에게도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젊은 시절이 있었을 터이다. 그리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그 회사 어른들은 신문을 읽는 게 하루 중 가장 어려운 과제인 것마냥 뇌의 사용량을 줄여버리고 살게 된 걸까.

환경의 위력이 여기에 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업무 난이도가 고등학교 공부보다 낮다. 일을 하는 시간 자체는 길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리를 쓰는 일은 별로 없다. 반복적이고 재미없는 일을 매일 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느려지고, 바쁘게 움직이지도 않게 된다. 사람이 느려진다. 나무늘보처럼.


그들에게는 1초가 아까워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며 techcrunch나 wsj를 읽을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아보였다.

신입사원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매번 똑같은 '역산' 같은 것일 뿐, 본인도 자기 업무 분야에서 계속해서 새로 알아가는 것이 없었다.


반면 바쁘고 빡센 회사들을 살펴보자. 컨설팅, 로펌, IB 등은 어느 나라에서든 가장 빡세기로 유명한 업종이다. 그런 회사에서 신입사원에게 '역산' 같은 것을 가르칠 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가르친다 해도 같은 말을 두 번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수를 연발하면 그 직원이 더 유능한 직원으로 대체되거나 성장하지 못할 뿐이지, 걸음마 같은 것을 가르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못한다. 선배들이 냉정하고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들 본인도 새로 주어진 프로젝트를 이해하고 처리하느라 바쁘다. deal/project마다 새로 배워야 하는 게 수북하기 때문에, 전표 처리나 스캔 같은 단순한 일을 가르치고 있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입사원의 입장에서도 항상 자기 capa보다 살짝 많고 어려운 일이 주어지기 때문에, 실력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도전의식이 생겨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중간에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meritocracy가 형성되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선배가 "빡세게 일해도, 그 시간 내내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는 건 곧 나의 성장을 의미하고 아직 젊기 때문에 그런 배움의 시간이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을 때는 그런 삶이 빡세보여서 싫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고마운데 거기에 돈까지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그런 생각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에 가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바로 당근영어 노상충 대표이다. 내가 한창 퇴사를 고민할 때 이 글을 읽고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 내가 회사를 가는 유일한 이유는 "다달이 나오는 월급"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아침에 회사를 향하는 길에서 나는 아무 기대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고. 이 다음 글에서 목적의 중요성에 관해 쓸 계획인데, 아무튼 결국 같은 고민이었다.


노상충 대표가 갖고 있던 생각은 소름끼치도록 내 생각과 똑같았다. 그래서 더 과감하게 퇴사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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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회사에서 더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그런 회사를 다니다간 큰일 난다. 하루하루가 개인의 인생에 마이너스가 되고,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일을 통해서 성장할 생각이 없다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고객과 동료들 그리고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성장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를 조직의 부속품처럼 한계 짓고,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의욕이나 열정이 없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까지 기운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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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아까웠던 시간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2014년 한 해를 떠올린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질문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발전할 수 있으니까? 배울 수 있으니까? 부양할 가족이 있으니까? 모두 아니었다. '그냥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소중한 스물 여섯 한 해가 날아갔다. 그나마 1년만에 나온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새롭고 흥분되는 것을 배우고 싶은 강박증에 시달리며 나는 월급을 투자해 새로운 사업을 반복적으로 시도했다. 그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500배는 더 큰 것 같다.


두 번째도 정말 공감이 된다. 나의 이런 생각은 회사에도 큰 피해를 준다. 솔직히 나는 회사 동료들의 패배주의, 안전지향성, 가늘고 긴 인생관을 혐오했다. 같이 대화하다 보면 답답했다. bell curve의 가장 두꺼운 부분, 그 중심부에서 조용히 살다가 죽는 인생을 그들은 선호했다. 심지어 본인도 그런 삶이 싫은데 억지로 살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보기만 해도 나는 지치곤 했다. 위험에 대한 선호도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그들에게는 옳다. 다만 내가 그런 삶의 태도를 싫어한다. 싫어할 자격이 어딨댜고 물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냥 싫다. 그들은 나에게 de-motivator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생각이 분명히 회사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내가 계속 회사에 남아 있었다면 그것이 회사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들었을 것이고, win-win이 아닌 lose-lose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더 빨리 나와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재미도 없고 목적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I don't give a shit!!"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신입사원으로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결근과 지각을 합친 일수가 15일에 가까웠고, 회사에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지 말고 구두를 신고 다니라는 '뒷얘기'를 들었고, (그런 얘기도 직접 얘기할 만큼 권위가 있거나 용감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회사라니, pathetic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 시간에 탁구를 치거나 휴게실에 벌러덩 눕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회사를 빨리 나온 게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었던 이유다.


써놓고 보니 횡설수설인데, 결론은 이거다. 한가하고, 아무 생각도 필요로 하지 않고, 배울 게 없는 직장에 너무 이른 나이에 들어가버리면 후회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3년 후 내가 지금의 나보다 크게 성장해있을까 자문할 때도 자신 있게 대답하기 힘들다.


지금 그런 직장에 있다면, 나올 자신이 있으면 나오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최소한 개인적으로 치열하게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공부하는 게 맞다.


3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르고, 그 후에도 자신이 지금보다 특별히 잘하는 게 없으면 후배들과 동일한 과제로 동일한 경쟁선 상에서 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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