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유민이형, 건아형을 데리고 필리핀 마닐라, 바칼로드, 보라카이, 세부를 데리고 다녀준 현지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화교 3세대다. 여행 기간 동안 그의 아버지, 어머니, 누나도 함께했다. 무엇을 하든 온가족이 함께 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조금 더 소개하자면 그의 가족, 친척들은 바칼로드 지역에서 꽤 큰 가족경영을 한다. 생수, 빵도 생산하고 부동산과 공장, 가게들을 여럿 가지고 있다. 그 지역의 큰 부자라고 볼 수 있다.
필리핀 여행 내내 이 친구와 얘기할 기회가 많았는데, 서로 나눈 얘기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보여준 business mindset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질릴 정도로 절약을 한다. 무엇을 사려고 하면 근처의 모든 가게를 돌아다녀보고, 가장 싼 것을 찾은 다음 흥정을 통해 가격을 더 깎는다.
보라카이에서 우리가 비치발리볼을 사려 했을 때, 가게 주인이 당초 제시한 가격은 380페소였으나 그의 가족이 흥정에 나서자 공의 가격은 250페소가 되었다.
그들은 한 시간 반 동안 긴 해변을 따라 거의 모든 가게를 들러 공의 가격을 확인했고, 대략적으로 형성된 가격 범위 내에서 흥정을 했다. 그 사이 해가 저물고 물도 차가워진 탓에 정작 공놀이는 거의 하지 못했다. 다음날 실컷 할 수 있었지만.
절대 한푼이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여행을 온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까지 어떻게 보면 쪽팔린, 이런 철저함을 보이는 그들의 비즈니스 마인드가 놀랍기도 하고 질리기도 해서,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싸게 사냐. 그걸 찾는 시간이 더 아깝지 않냐. 우리가 흥정을 통해 할인한 130페소(3,000원 정도)가 90분의 시간보다 비싸다는 것이냐."
나는 내 시급이 20,000원~30,000원 사이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5,580원이기도 하고. 즉 시급보다 적은 돈을 아끼려고 한 시간 반을 써버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도 시급을 기준으로 시간과 돈의 가치를 계산하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일반적인 인건비가 8시간에 287페소(8,000원 정도)이다. 나는 4시간 분량의 시급을 위해서 90분을 쓴 것이기 때문에 훨씬 이득이다."
실제로 그의 가족은 7명의 하인(동남아에는 아직 노예 비슷한 문화가 존재한다. 집과 밭, 가게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있다.)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계산에 익숙할 것이고 워낙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우리 돈으로 1,000원 정도 되는 돈도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곧장 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새로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근거를 수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어느 경제권에서 생활하느냐에 따라 시간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쓰는 시간, 그리고 일반적인 한국 사람의 시간이 필리핀 사람의 시간보다 비싸다. 가격이 가치를 반영한다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따르면 선진국 노동자의 하루가 후진국 노동자의 하루보다 가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ㅋㅋ 한 달에 100만원 버는 서울의 택시 기사가 한 달에 10만원 버는 인도의 구불구불한 도로 위의 베테랑 택시 기사보다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한편으로 서울의 택시 기사가 나르는 승객이 아끼는 시간의 가치와 그의 경제활동이, 인도 택시 기사가 나르는 승객의 노동에 비해 질이 높고 더 많은 지식과 교육을 요구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가치와 가격이 대충 비례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내가 그에게 내 시급이 많을 때는 25,000원(200페소) 정도 한다고 하자 그는 크게 놀랐다. 필리핀의 10배 이상인 것이다. 국내 최저임금과 비교했을 때도 필리핀의 인건비는 정말 낮다.
즉 보라카이에 놀러온 한국인에게 130페소를 아끼기 위해 한 시간 반 동안 돌아다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되지만 현지인에게는 수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필리핀 사람들 모두가 이런 식으로 3천 원을 위해 90분씩 소비하게 된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적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3천 원을 그냥 내고 그 시간에 3천 원보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런 노동의 인프라가 갖춰진 것이다. 국가의 주요 산업이 고부가가치로 이동할수록 같은 시간 동안 생산해내는 가치의 양이 많아진다. 그래서 고부가가치 산업이 더 발달한 선진국에서 90분이 130페소보다 훨씬 비싸지는 것이다.
한편 나는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끼고 아껴서 필리핀 사람들이 버는 돈이 1년에 3~5천만 원 정도 된다면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꽤나 큰 돈일 텐데, 우리나라의 직장인 1명이 버는 돈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국이라는 곳에서 자라나고, 취직해서 먹고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필리핀으로 따지면 그 지역에서 꽤나 잘 사는 축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나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친구가 필리핀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최저임금 1,000원 정도에서 자기 몸값을 올리기 시작하지만 나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보다 5배 이상의 돈을 벌 수가 있다.
단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경쟁우위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가 필리핀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만약 내가 아이폰이나 독일제 외제차를 사고 싶다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는 게 유리할까? 더 큰 경제권에서 태어나거나 일을 하는 것이 당연히 유리하다. 한국-필리핀처럼 차이가 크진 않겠지만, 그들 세계에서는 작은 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큰 돈인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최근 도시의 발달 정도를 보여주는 BMK/롯데리아 지수가 SNS에서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나는 비슷한 척도로 iPhone 지수를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안, 잘 사는 나라일수록 iPhone이 더 흔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ㅋㅋ)
사람은 그래서 큰 물로 자꾸만 나아가야 하는 것 같다. 뉴욕 증권가에서 밀려난 사람이 한국의 은행가에서 괜찮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갈수록 그런 현상이 없어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많이 따라잡았다는 얘기)
메이저리그에 있던 사람이 마이너리그로 내려오면 거기서 key player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예를 들기도 했지만 더 큰 물에서 항상 더 뛰어난 수영 실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곳에 머물기만 하면 알아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가 있게 된다. 공부를 딱히 열심히 하지 않아도 국제학교를 나오면 3개 국어가 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필리핀 친구의 얘기로 돌아와서, 놀랍고도 존경스러운 그의 가족의 비즈니스 마인드를 미국으로 가져갔다면 그들은 몇 배나 더 크게 사업을 키웠을 수도 있다. 물론 환경도 다르고 운도 필요했겠지만 시장과 자본의 사이즈 자체가 다르니까. (비슷한 시기에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세운 기업들이 오늘날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을 '이민' 편에서 소개할 예정.)
결론적으로 사람이 가진 능력과 지식, 경험 등도 중요하지만, 큰 그림을 그려보자면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노는 물, 즉 그가 처한 환경이 아닐까 싶다. 같은 옷이 동대문에서보다 가로수길에서 더 비싸게 팔리는 것처럼, 같은 능력의 사람이라도 더 큰 시장에서 더 큰 몸값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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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절반이 지났다. 필리핀, 마카오,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지금은 보르네오 섬에 있다. 사랑스러운 장소들이다.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