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여행 - 1. 하프타임

by Dongeun Paeng
Feb 06, 2015 · 만 25세

여행의 절반이 지났다. 필리핀, 마카오,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지금은 보르네오 섬에 있다. 사랑스러운 장소들이다.


여행을 다니며 했던 생각들을 짧게 메모해놓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다 쓰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얇은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이 나올지도.


주제별로 생각한 것들은 나중에 따로 적기로 하고, 여행 자체에 대해서 느낀 점은 현재까지는 이렇다.


1. 여행도 중독성이 있다. 1년, 2년 배낭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는 것 이상으로, 나도 일상을 내려놓고 여행만 줄창 다니고 싶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을 여행 다니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한 적도 있다. '저 사람들은 결혼도 취직도 안 할 생각인가. 계획이란 게 없는 인간들인가. 부모님 속 터지실 듯.' 이런 생각들을 했었는데, 지금은 한 곳에 뿌리박지 않고 땅 없이 집 없이 차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무소유의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 것도 없이 이 땅에 왔듯이, 떠날 때도 동전 한 닢 가져가지 못하고 결국 남는 것은 행복한 순간들의 총합이다, 라는 So Cool한 태도인 듯. (근데 다치면 병원도 가야 하고, 신발도 사고 옷도 사고 해야 할 텐데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건지 모르겠다ㅋㅋ 1억 정도 비상금을 모아 저축해둔 후에 무전여행을 다니면 어떨까?)


2. 처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여행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가 되니 높은 수준의 자유도를 만끽할 수 있었다. 때로는 오히려 적절한 외로움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록 돕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기존의 가까운 친구들 못지 않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국적 불문하고 다들 사람인지라 solo traveller들은 약간의 외로움을 품고 다니는 것 같다. 그래서 친구 되기가 더 쉽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만난 친구들의 국적은 미국, 필리핀,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이었는데 모두 혼자 여행중이었고, 만난 지 몇 시간만에 친해져 그 날 새벽 4시까지 다리 위에서 맥주를 까며 놀다가 흩어졌다. 다만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교성과 언어 능력(외국어)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나 술 한 잔 못하는 사람,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은 광범위한 친구를 사귀기는 힘들 것이다. 나도 중국어, 광동어를 못하는 게 여행 내내 무척 아쉬웠다.


3. 어릴 때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늦게 여행하면 한국에 두고 온 게 많아서 끈 묶인 연이 날아다니는 것처럼밖에 안 된다. 여기저기 다녀보니 이 좋은 나라들을 두고 굳이 한국에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그래서 대학 시절에 해외여행을 많이 가보면, 졸업하고 나는 여기서 일하고 싶다 혹은 여기서 살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런 경우도 실제로 적은데, 졸업 전에 꼭 포함해야 할 진로 선택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줘야 국내에 일자리 부족 현상이 완화될 수 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직군에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어학 능력의 공급과잉 현상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게 곧 사회적 비용이다.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정된 파이를 놓고 벌이는 zero-sum 게임에서의 승리를 위한 스펙(도구)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 교육을 받고 영어도 할 줄 아는데 편의점이나 주유소 알바를 해야 하는 나라가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관련 글)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른 나라를 가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민' 편에서 다루기로!


4. 뻔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면 시야가 넓어진다. 'How Google Works'에서 에릭 슈미트가 젊은이들에게 한 조언 중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지금 있는 곳을 빠져나오라. 어느 곳이든 다른 데로 가서 살면서 일하라. 국외근무가 어렵다면 여행을 하라."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거다. 내 경우에는 2번의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새벽까지 마약, 종교, 섹스, 정치, 역사 등 별의별 주제로 얘기를 나눴는데, 내가 보편적인 사람들 사이의 동의사항이라고 당연시했던 것들이 상당 부분 주입된 것이기도 했다. 음모론은 아니지만 어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을 세뇌시키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국가, 종교, 직장, 학교 등 모든 곳에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그런 게 조금씩 존재한다(과장하자면ㅋㅋ). 그런데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는 뭐가 진짜인지 알기 어렵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외계인들을 만나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것은 그래서 참신한 경험이 된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질서가 그들의 관점에서는 때로는 지나친 간섭이나 통제이기도 했다. 어디서 왜 생겨났는지 족보도 없는 규율들. 특히 한국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가치들 중 내가 오래 전부터 의심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조만간 시간을 따로 내어 쓸 예정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못난 기준들(결혼, 학교, 직업 등)에 대한 얘기도 시간이 된다면 쓰겠다.


내 나이 또래 남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기준과 시선에 지쳐 있던 터라, 여행을 다니며 우리나라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만 더 커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미래의 나에게 좋은 생각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어 우리나라가 나(기득권)에게 주는 다양한 혜택과 복지에 취해 이 글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기대가 된다ㅋㅋ


내일부터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필리핀에서부터 싱가포르까지, 내가 느낀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보아야겠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


-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섬에서, 2015.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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