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여행 - 1. 하프타임
무소유라...
여행의 절반이 지났다. 필리핀, 마카오,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지금은 보르네오 섬에 있다. 사랑스러운 장소들이다.
여행을 다니며 했던 생각들을 짧게 메모해놓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다 쓰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얇은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이 나올지도.
주제별로 생각한 것들은 나중에 따로 적기로 하고, 여행 자체에 대해서 느낀 점은 현재까지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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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중독성이 있다. 1년, 2년 배낭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는 것 이상으로, 나도 일상을 내려놓고 여행만 줄창 다니고 싶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평생을 여행 다니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한 적도 있다. '저 사람들은 결혼도 취직도 안 할 생각인가. 계획이란 게 없는 인간들인가. 부모님 속 터지실 듯.' 이런 생각들을 했었는데, 지금은 한 곳에 뿌리박지 않고 땅 없이 집 없이 차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무소유의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 것도 없이 이 땅에 왔듯이, 떠날 때도 동전 한 닢 가져가지 못하고 결국 남는 것은 행복한 순간들의 총합이다, 라는 So Cool한 태도인 듯. (근데 다치면 병원도 가야 하고, 신발도 사고 옷도 사고 해야 할 텐데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건지 모르겠다ㅋㅋ 1억 정도 비상금을 모아 저축해둔 후에 무전여행을 다니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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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여행은 전혀 외롭지 않았다. 완전히 혼자가 되니 높은 수준의 자유도를 만끽할 수 있었다. 때로는 오히려 적절한 외로움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록 돕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기존의 가까운 친구들 못지 않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국적 불문하고 다들 사람인지라 solo traveller들은 약간의 외로움을 품고 다니는 것 같다. 그래서 친구 되기가 더 쉽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만난 친구들의 국적은 미국, 필리핀,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이었는데 모두 혼자 여행중이었고, 만난 지 몇 시간만에 친해져 그 날 새벽 4시까지 다리 위에서 맥주를 까며 놀다가 흩어졌다. 다만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교성과 언어 능력(외국어)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나 술 한 잔 못하는 사람,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은 광범위한 친구를 사귀기는 힘들 것이다. 나도 중국어, 광동어를 못하는 게 여행 내내 무척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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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늦게 여행하면 한국에 두고 온 게 많아서 끈 묶인 연이 날아다니는 것처럼밖에 안 된다. 여기저기 다녀보니 이 좋은 나라들을 두고 굳이 한국에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그래서 대학 시절에 해외여행을 많이 가보면, 졸업하고 나는 여기서 일하고 싶다 혹은 여기서 살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런 경우도 실제로 적은데, 졸업 전에 꼭 포함해야 할 진로 선택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줘야 국내에 일자리 부족 현상이 완화될 수 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직군에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어학 능력의 공급과잉 현상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게 곧 사회적 비용이다.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정된 파이를 놓고 벌이는 zero-sum 게임에서의 승리를 위한 스펙(도구)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 교육을 받고 영어도 할 줄 아는데 편의점이나 주유소 알바를 해야 하는 나라가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관련 글)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른 나라를 가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민' 편에서 다루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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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면 시야가 넓어진다. 'How Google Works'에서 에릭 슈미트가 젊은이들에게 한 조언 중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지금 있는 곳을 빠져나오라. 어느 곳이든 다른 데로 가서 살면서 일하라. 국외근무가 어렵다면 여행을 하라."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거다. 내 경우에는 2번의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새벽까지 마약, 종교, 섹스, 정치, 역사 등 별의별 주제로 얘기를 나눴는데, 내가 보편적인 사람들 사이의 동의사항이라고 당연시했던 것들이 상당 부분 주입된 것이기도 했다. 음모론은 아니지만 어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을 세뇌시키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국가, 종교, 직장, 학교 등 모든 곳에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그런 게 조금씩 존재한다(과장하자면ㅋㅋ). 그런데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는 뭐가 진짜인지 알기 어렵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외계인들을 만나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얘기를 듣는 것은 그래서 참신한 경험이 된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질서가 그들의 관점에서는 때로는 지나친 간섭이나 통제이기도 했다. 어디서 왜 생겨났는지 족보도 없는 규율들. 특히 한국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가치들 중 내가 오래 전부터 의심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조만간 시간을 따로 내어 쓸 예정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못난 기준들(결혼, 학교, 직업 등)에 대한 얘기도 시간이 된다면 쓰겠다.
내 나이 또래 남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기준과 시선에 지쳐 있던 터라, 여행을 다니며 우리나라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만 더 커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미래의 나에게 좋은 생각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어 우리나라가 나(기득권)에게 주는 다양한 혜택과 복지에 취해 이 글을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기대가 된다ㅋㅋ
내일부터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필리핀에서부터 싱가포르까지, 내가 느낀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보아야겠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
-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섬에서, 2015. 2.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