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가끔씩 전화해서 내게 위로받곤 하는 동생이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취직을 준비하는 여자아이인데, 영어는 원어민과 다를 바 없고 영상 촬영 쪽에 재능과 관심을 갖고 있는 친구다.
여느 유학생이 그렇듯 한국에서 취직이 어려워서, 내가 여기저기 소개해주기도 했다.
지금은 한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인턴(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잘 다니나 싶더니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같이 일하는 어른들 분위기 맞추는 것이 어렵다고 얘기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소외감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중요한 사내 메일을 소문으로 들어 안다든지, "~까지 일할 친구예요" 라는 말로 소개된다든지, 이전에 있던 친구와 사사건건 비교당한다든지 하는 작은 행동들이 그 친구로 하여금 자신이 계약직임을 처절히 느끼게 한 것 같다.
계약직 만료일자까지 매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심사되고 평가된다는 불안감 속에서, 상사의 말 표현 하나하나가 자신에 대해 매긴 그 사람의 점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처음엔 징징대지 마라, 남의 돈 먹기가 그리 쉬운 줄 아냐, 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그 친구는 나와 상황이 달랐다.
당장 5개월 뒤에 정규직이 못 되면, 다시 백수,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이만 더 들어버린 채로. 자신의 인생이 헤어나올 수 없는 계약직의 굴레로 빨려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고, 이번 인턴이 마지막 기회이고, 매일매일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한 불안감이었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미생 얘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는 그 드라마를 절대 안 본단다. 결국 주인공이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면, 그 얘기가 꼭 자기 얘기일 것만 같아서 무서워서 볼 수가 없단다. 그 말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100% 공감할 수 없어 슬펐다. 나는 한 번도 계약직이어본 적이 없다. 잘릴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매일같이 엄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조직 속에서 소외감을 느껴보지도, 위화감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동갑내기 정규직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 일은 옆자리에서 하는 이상한 경험을 해보지도 못했다.
더 슬픈 것은 그런 사람이 이 친구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계약직 사원들이 최소 100만 명(통계상 비정규직 숫자는 600만 명 내외)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씩씩하게 살고 있겠지만, 백도 없고 돈도 없는, 정말 돈을 모아서 중산층의 생활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은 얼마나 절박하고 불행할까.
마지막으로 슬픈 것은 그들의 직장과 나아가 생계를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그 친구의 슬픈 울음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징징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만약 나처럼 철 없고 이해심 부족한 사람이 사장이라면? 근로기준법을 입법하는 위치의 사람이라면?
그들의 아픔을 피부로 느껴본 적도 없이 경제 발전과 낙수효과만 열심히 외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며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안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사장이라면 고용 유연화를 이루는 게 현명한 일일 것이다. 쉽게 자르고, 쉽게 고용하고. 하지만 누군가의 아는 선배로서, 오빠로서, 형으로서 나는 내 주변의 계약직들을 외면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고는 큰 돈을 벌 수 없는 것일까.
1,000조원을 벌겠다는 내 꿈을 달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약자들의 어려움을 외면해야 할까. 얼마나 많은 근로자의 목숨을 빼앗아야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난을 안겨야 할까.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내가 자본가로서 성장하려면 그만큼 많은 노동자들이 나에게 자신의 시간을 공짜로 양보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걸까?
모르겠다. 어렵다. 누가 속 시원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공평하게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가 불공평하게 사는 이 세상을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떤 모습의 사회이든 고통의 연속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없다.
그게 지금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현실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아직 내 상상력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은 아무도 굶어죽지 않는 세상일 뿐이다.
최소한의 이상주의, 하지만 개인이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이상주의. 그것이 "기아(starvation) 없는 세상"이다.
P.S.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의 신분으로 여행을 떠나는 나의 상황을 생각해봤다.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있지만, 결국에는 잘 될 거라는 확신은 있다. 나에겐 학벌이라는 게 있어서일까? 그렇다면 미국에 단순 이민자로 떠난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결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럼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의 경우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믿음에서 온다. 그 분이 나를 지켜주시고, 먹여주시고 재워주실 것을 믿는다. (정말? 100% 자신 있어? 이것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이 의지할 만한 신념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비슷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 신념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 더 오래, 더 강하게 버틴다. 경쟁사회에서 필수 요소이다. 물질에 의존하기보다, 하루 중 일정 시간을 내면을 가꾸는 데 투자할 필요가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대부분 자기 혼자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명상과 수양은 인생을 나아감에 있어 중요한 쉼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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