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칠기삼 - 두 번째 이야기

by Dongeun Paeng
Jan 13, 2014 · 만 24세

내 글을 쭉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인생 전반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달리 운보다는 노력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한다.


왜 사람들은 명명백백한 운의 비중을 인정하기 싫은 것일까? 내 생각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확실하고 영원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생이 운빨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당연지사, 죽어라 노력해봤자 운 나쁘면 결과가 시원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쾌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눈을 질끈 감지 않는 한, 우리 주변에는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이 없어 불행을 겪은 사람들의 사례가 수없이 많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프리라이더랑 팀플을 같이 하게 돼서 학점이 잘 안 나온 사람, 사업이 잘 되기 시작할 무렵 사기 당한 사람, 행복한 40대에 접어들었는데 희귀병에 걸려 치료비로 재산을 다 써버린 사람,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게 된 사람 등.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네이버의 이해진, 한게임과 카카오톡의 김범수, 싸이월드의 이동형 등 물론 크게 성공했지만, 이들이 미국에서 같은 서비스를 런칭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주커버그나 세르게이 브린, 래리 페이지와 같이 됐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내수시장과 미국의 내수시장은 비교 불가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즉, 같은 제품/서비스를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더라도 운 좋게 미국이나 중국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사람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남과 비슷한 노력과 능력으로도 내가 있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더 큰 소득과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결론도 도출이 가능하다. 장하준 교수가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보면, 선진국 택시 운전자는 후진국 택시 운전자에 비해 특별히 더 노력을 한다거나, 실력이 좋은 게 아닌데 소득이 더 높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별히 실력 있는 택시 운전자만이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이 또한 운이다.


이처럼 조금만 생각해보면 운 없이 100% 노력만으로 성공, 실패가 결정되는 경우는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떤 불운으로 인해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좌절스런 결말을 예상하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내가 보기에는 스스로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는 듯하기도 하다. 운을 인정해버리는 순간 불확실성이 가득한 컴컴한 미래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내가 이렇게 운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는 이제까지의 경험이 큰 몫을 한다.


나는 원래 서울대학교에 들어올 실력이 못 됐다.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뿐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 중 누구도 내가 서울대학교에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2008년 딱 한 해 수능이 등급제로 운영되면서, 나는 모든 과목에서 턱걸이로 1등급을 받았다. 점수로만 따지면 반에서 2~3등이었다. 나보다 점수가 높았음에도 어떤 친구들은 한두 과목에서 2등급을 받아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렇게 똑똑한 친구들과 공부하게 된 데에도 운이 따랐다. 나는 대전외국어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경쟁률이 1:1보다도 낮아서 쓰기만 하면 거의 붙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나는 모범적인 선후배, 유능한 선생님들로 둘러싸인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009년에는 카투사로 용산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카투사가 안 되면 특전사나 해병대를 가서 제대로 구르고 싶었는데, 편하디 편한 용투사라니. 카투사도 추첨으로 뽑히지만, 그 안에서 근무지를 결정할 때도 추첨이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아주 잘해왔고, 앞으로는 더 잘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많은 요소들 중, 운이라는 불확실한 portion을 어떻게 제거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런 portion은 없다고 억지부리지 말고, 종교든 명상이든 무엇이든 운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성패의 많은 부분을 운에게 내어줄 때, 성공에 대해서는 겸손을, 실패에 대해서는 관용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P.S. 끝으로 격한 공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아인슈타인의 명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가장 첨단의 지식에 도달했고, 가장 천재적이었던 사람이 남긴 말이니만큼 깊은 의미가 있지 않은가 싶다.


Everything is determined, the beginning as well as the end, forces over which we have no control. It is determined for the insects as well as for the stars, Human beings, vegetables or cosmic dust, we all dance to a mysterious tune, intoned in the distance by an invisible piper.


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 별, 인간, 식물, 우주의 먼지뿐만 아니라 벌레 등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의 피리 부는 사람의 곡에 맞추어 춤을 출 뿐이다.


(2024-01-27: 10년이 지난 지금도 운칠기삼은 제 신조입니다. 운칠기삼의 태도로 보면 타인의 실패에 더 관대하게 되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도 '운이 나빴어'라고 얘기할 용기는 아직 없습니다. 즉 저 스스로의 실패에 대한 관용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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