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판단, 가치판단 - 1 종교

by Dongeun Paeng
Aug 16, 2013 · 만 23세

토론이 격해지면 의가 상하는 주제가 두 개 있다고들 한다. 첫째는 종교, 둘째는 정치다.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찬가지인 듯하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종교와 정치는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답이 없으니 추측만 갖고 서로 싸우는 것이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주로 가치와 관련된 것들인데, 가치판단의 경우 사람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의 문제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기가 어렵고 합의점을 찾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린다.


반면 사실(fact)판단의 문제는 싸움이 나지 않거나 금방 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구의 스마트폰이 인터넷 화면을 가장 빨리 띄우는가 하는 문제는 답을 내리기 쉽다.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어놓고 동시에 화면을 띄워보면 된다. 더 엄밀히 하고 싶다면 기계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된다. 화면을 보여주는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하드웨어 요소들은 무엇인지, 기계별 성능은 어떻게 다른지 등을 비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실판단 문제는 정확한 사실을 획득하는 순간 결론이 난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중학교 도덕 시간에 배우는 개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차이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구분하여 행동하지 않는 것 같다. 가치판단과 도덕판단을 따로 보는 교과서도 있는데, 도덕판단을 가치판단의 일종으로 보아도 크게 문제되는 것 같지 않다.


어쨌든, 정치나 종교는 사실보다는 가치를 놓고 싸우는 경향이 강하다. 그 중에서도 종교가 더 그런 경향이 있다. 종교는 밑바닥의 사상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까지도 가치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현상에 대해서는 사실판단이 가능하다. 실업률, GDP 성장률, 세율, 국민 만족도, 행복지수 등 각종 사회과학 지표들을 통해서 조사가 가능하다. 그런데 종교 행위는 사실판단이 불가능하다. 저것이 옳다, 그르다, 누구의 잘못이다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가치판단의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 전체 종교를 비판하는 것과 그 개인을 비판하는 것은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그 짐을 개인이 지어야 할지, 종교 전체가 지어야 할지는 가치판단의 몫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잠시 옹호하는 입장을 펴자면,


만약 일부 종교인의 잘못을 그 종교 전체가 짊어져야 한다면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도 전체가 비판 받아야 하지 않을까?


국내의 예로 스님 도박 사건을 들 수 있다. 어느새 많이 잊혀진 듯한데, 당시에 불교 전체가 비판을 받지는 않았다. 왜일까? 도박은 누구나 하는 거니까? 불교계는 평소에 말썽을 안 부리니까?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어떤 한 가지 경우 때문에 그 경우가 속하는 집단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재고해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더 좋은 예로 이슬람교가 있다. 일부 과격 이슬람 단체가 테러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이슬람교 전체를 비판하는 경향은 기독교에 대한 그것보다 확실히 드물다. 국내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슬람교보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왜일까. 세금을 안 내거나 성폭행을 하는 것이 대규모 살상 테러보다 더 악질이어서? 이슬람교는 미국에서 소수니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정치든 종교든 가장 밑바닥에는 가치에 기초한 믿음(faith)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개념이 무척 중요하다. 지난 학기 전공 강의 중에 어느 교수님께서 과학과 믿음에 대해서 한 시간 정도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는데, 평소 나의 생각과 많이 닮아 놀란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현대 과학으로 밝히지 못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학자라 할지라도 결국 믿음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 특히 존경 받는 학자들은 추측 혹은 믿음에 불과한 것들을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에 섞어 팔기를 서슴지 않는다. 더 실망스러운 건 그들의 추종자들이다. 비판적 사고를 훈련하지 못한 아이들은 물론, 지성인들까지도 자신이 존경 받는 과학자의 입에서 나온 지식, 그의 손으로 타이핑된 지식들은 필터링이 필요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보는 것이다. 즉 어느 학자의 개인적인(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믿음에 근거한 의견과, 실제로 밝혀진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신과 영혼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무신론자의 논리가 불편하다. 하지만 그들이 신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불편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들의 '논리'이다. 나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주장이나 엄밀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에 대해서는 절대 부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 감탄하기도 한다. 위의 교수님은 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가 아닌 불가지론자의 입장을 취했는데, 진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진짜 밝혀진 사실들의 한계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신이 있다! 혹은 신이 없다! 라고 외치기보다는 그렇다고 믿는다! 라고 얘기하는 절제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은 최소한 현재로서는 신의 존재나 비존재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도, 과학적으로 보여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상술했듯, 신의 존재, 사후세계, 우주의 기원, 영혼의 존재와 같은 것들은 논리나 과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2013년 8월 21일 현재까지 확실히 불가능) 어떤 철학자나 과학자도 신의 존재 혹은 비존재를 입증하지 못했다. '이기적 유전자', '눈 먼 시계공' 등으로 유명한 무신론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는 신이 없다고 '믿지만', 그것을 자신이 일생 동안 축적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고도 밝히지 못했다. 그럼에도 신이 없다고 확신에 차 얘기하고, 또 유신론자를 비꼬는 태도 때문에 나는 그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이 맞다고 '믿는' 사람들을 많이 양산한 것 외에 그의 논리가 강하다고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


(2024-01-26: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을 무조건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중간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에 오류가 많음을 발견하고, 삭제했습니다. 나머지 내용은 '지금도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성 당시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남겨두었습니다.)


사람들은(우리는) 대부분 "종교=비과학"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solid fact)을 보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위대한 과학자와 동시에 종교인인 사람들이 많고,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과학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세계적인 과학자, 나보다 과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종교인이면 그 즉시 나보다 비과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인가?


모순이다.


과학이나 논리라는 용어가 종교의 반댓말처럼 쓰이는 것은 몇몇 존경받는 무신론자가 자신의 과학적, 논리적임을 먼저 입증한 후, 종교를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1942~), 샘 해리스(Sam Harris, 1967~),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 1949~2011) 등이 등장하면서 현대의 무신론이 발전했다.


한편, 유신론도 빈약한 논리이긴 마찬가지이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그토록 잔인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특정 민족만 선택하고 다른 민족은 버렸는가, 하는 것들이 가장 큰 모순점 중 하나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도망쳤을 때 세상에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그의 가족 밖에 없었을 텐데,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 등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둘 다 가정과 개인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맞다라고 무조건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 나쁜 것은, 반대 입장을 조롱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론을 단 하나의 설명으로 정립시키기 전에는 다른 이론들을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아는 것은 많지만 인격적으로는 오만하고 동시에 미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학자일수록, 자신의 믿음(가치)와 학계가 밝혀낸 완전한 사실(solid fact)를 구분해서, 우리 학계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정확히 ~까지이며, 그것에 기반한 나의 '믿음, 추측, 사견, 기대'는 ~이다. 라고 해야 그 말을 듣고, 읽고, 배우는 사람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학자의 개인적인 추측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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