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왠지 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기에 편리해서인지, 머릿속에서 어떤 대상을 몇 종류 정도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흔히 '남자는 대부분 이렇고, 여자는 대부분 이렇다.'라든지, 'A형, B형, AB형, O형은 이렇다.'라든지 하면서 70억이 넘는 다양한 사람을 몇 개 안 되는 그룹으로 범주화하고는 한다.
범주화가 나쁘거나 무조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사용하는 범주화는 대부분 맞으며, 거의 모든 경우에 대해 설명력을 가진다.
범주화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범주가 대상의 모든 측면을 설명한다고 판단할 때이다. 둘로 나뉘는 범주에서 흔히 이런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아이를 양육할 때에도 그런 경향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것이, 어느 나라나 동화책의 이야기 흐름이 비슷비슷하다. 착한 주인공과 나쁜 악당. 착한 주인공이 결국 이기고 나쁜 주인공을 무찌른다는 전개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사실 어떤 사람이나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해 선하다, 악하다를 딱 떨어지게 구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행동이 선과 악 둘 중 하나의 성질만 갖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의 의도는 선한 의도와 악한 의도 둘 중 하나로 딱 떨어지는 것이 가능하지만, 행위의 결과는 선 혹은 악으로 단정짓기 어렵다.
홍길동은 남의 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고전 영웅이다. 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홍길동은 완전 나쁜놈이다. 개인적으로 원수진 일도 없는데 자기 재산을 다 털어간 것이다. 하지만 도둑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도왔기에 홍길동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그는 멋진 사람으로 기억된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의 모든 이름 예시에 '홍길동'이 등장하겠는가.
홍길동의 이야기를 조금더 극적으로 만들어보자. 홍길동에게 털린 부자들 중 몇몇은,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몽땅 털리고 인생에 회의를 느껴 가족들과 함께 집단 자살을 하게 된다. 얘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홍길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 것이다. 영웅이라고 하기도 조금 무안해진다. 여전히 홍길동의 편에 서서, 그러게 부자가 되지 말지 그랬어, 라며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한편 홍길동이 자신의 무공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지 않았다면, 부자는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혔을 것이다. 홍길동의 측근들은 능력을 썩히는 홍길동을 비난했을 것이다. 비겁자, 이기주의자 같은 별명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홍길동의 행동은 선하다 혹은 악하다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정확히 얘기하려면 홍길동이 한 일은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양자가 갖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중첩(superposition)'이다. 즉 양자는 여러 상태(position)을 한 번에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선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재산을 약탈하고 도둑질을 한 것, 악한 부자는 그렇다 쳐도 무고한 식솔까지 자살로 몰아넣은 것은 분명히 악한 행동이고, 그 질도 아주 나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홍길동을 '의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의 도둑질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화에서는 도둑질을 당한 부자가 그 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됐는지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길동의 행동을 착한 행동, 의로운 행동으로 판단하고 책을 덮게 된다.
책에서 부자의 삶이 홍길동 때문에 불행하게 마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독자들의 마음이 찝찝하고 불쾌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역시 명쾌하게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착하면 착했지, 복잡하게 뭘 더 생각해!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착하면서 악하기도 한 모순적인 상황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서일까.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악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고 미숙하기 때문에, 좋은 면만 갖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모순되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떠올릴 때 혼란스러워한다.
고전소설 속에서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현실에서도 선악이 혼재하는 경우는 많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장소와 상황에 따라 성격을 달리 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이 가식적이거나 이중인격자라서가 아니라, 원래 사람이 그렇다. 따라서 내가 마주하는 상대방의 모습은 내 앞에서만 그런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보는 상대방의 모습으로 그 사람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배신감에 고생할 가능성이 크다.
어릴 때 본 동화들이 전부 착한 사람 vs. 나쁜 사람의 대결구도였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은 쭉 착해, 나쁜 사람은 쭉 나빠'라고 생각한다. 한 번 착하다고 판단된 사람은 좀처럼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실수는 덮어주고, 기다리면 착한 사람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반대로 처음에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힌 사람은 그것을 만회하기가 어렵다. 착한 사람보다 더 착한 행동을 해도, 성격 세탁이라는 오해를 받게 된다.
어릴 때부터 사람의 가변성, 선악의 중첩성을 직시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을 것 같다.
나쁜 사람이 착한 일을 해도 그 행위는 '착한 행위'이다. 어떤 행위가 사회를 더 낫게 만들었다면 그 행위의 공헌도는 명백히 +이다. 그 사람의 성격, 걸어온 길, 그런 행동을 한 의도 등은 행위와 분리시켜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말은 행위와 사람을 분리하라는 얘기이다. 죄를 지었을지언정 사람 자체는 그 행위와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죄는 미워하되 착한 일은 칭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나쁜 사람이 기부를 할 때 그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의 행위를 비난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쉬운 일이 발생한다. 어쨌든 기부금 총액이 줄고, 수혜자에게 피해를 입히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의 정신 세계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선한 일은 장려하며 악한 일은 제지해야 할 것이다. 한편 혼란을 피하기 위해 '나쁜 사람은 나쁘게 살아야지, 넌 착한 일 하지 마, 안 어울려.'라고 하는 경솔함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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