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부분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가 아니다.
이 때, 조바심 때문에, 혹은 지적 피로 때문에, 교재를 훑듯이 보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훑듯 지나가면 안 되고, 속도를 낮추어 천천히 보아야 한다. 한 줄 한 줄, 한 단어 한 단어.
그리고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어떤 문장이 이해 안 되면, 그 전 문장에서 어떻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Why?"라고 표시해두고, 인터넷에 검색해보거나 공책을 펴서 끄적거려보아야 한다.
저명한 수학자 알렉시 클레로(미적분학에서 클레로 정리를 통해 자주 만나게 된다.)에 따르면 "여태 발견된 수학적 지식은 모두 초보자에 의해, 초보자의 한계 내에서 발견되었다."
달리 말해 수학자들은 기존 지식으로부터 갑자기 새로운 지식으로 도약하지 않았다. 한 걸음씩 더듬더듬 나아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책을 읽을 때 이해가 안 되면,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 줄을 치고 물음표를 쳐보자.
내가 이해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속도가 적정한 속도일까?
한 쪽에 물음표가 5개 이상이면, 그 책은 나에게는 지나친 책이다. 이 때는 같은 내용을 훨씬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찾은 새 책은 어쩌면 분량이 2배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꺼운 책이 더 빨리 읽힌다. 왜냐하면 행간을 숨기지 않고, 문장과 문장 사이 인과 관계를 더 자세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에서, 이미 배운 지식은 그 사람에게는 '자명하다'. 그래서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타인에게 설명할 때, 다소 불친절해지는 우를 범하기 쉽다. 아무리 어려운 개념이라도, 자세하고 천천히 설명하는 2,000쪽 짜리 책을 읽으면, 언젠가 독파할 수 있다.
우리는 촘촘하게 연결된 지식을 공부할 때 조바심 내면 안 된다. 그 촘촘한 단계를 꼼꼼하게 밟아나가야 한다. 2,000쪽 짜리 책을 두 번째 읽을 때는, 그 중 대부분을 휙휙 건너뛸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재독 분량은 200쪽 내외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해석학 교재 초반에 대뜸 다음 식이 나오며 설명이 시작되는 경우가 잦다.
.
한 번 배운 사람은 null sequence(0으로 수렴하는 수열)의 엄밀한 정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리는 사람은 이해하는 데 한참 걸린다.
내가 공부하는 교재는 14쪽에 걸쳐 수렴 수열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he sequence is null if, for each positive number , there is an integer such that
We also say that the sequence is convergent with limit 0, or that converges to 0.
똑같은 뜻인데, 길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분량은 아래 설명이 더 많지만, 이해하는 사람 입장에선 아래 설명이 더 '빨리' 이해된다.
어려운 지식일수록, 두꺼운 교재가 얇은 교재보다 더 빨리 읽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자신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틈 메꿈'을 잊기 십상이다. 그는 현재 알고 있는 것 깔끔하게 구조화 하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구조화된 지식의 연역적 열거가 아니라, 귀납적 지침이 필요하다. 즉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는, 정상을 정복한 사람이 하산하는 길로 올라가면 안 되는 것이다. 올라갈 때는 더듬더듬, 오래 걸리지만 쉬운 길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 주변의 많은 교과서가 연역적으로 쓰여 있다. 즉 지식을 탐색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보단, 이미 그 탐색을 끝난 사람의 입장에서 handbook처럼 쓰여 있다.
(우정호 교수의 "학교수학의 역사-발생적 접근" 1부와 해석학 교재를 보며 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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