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회고록을 재밌게 읽고 있다. 좌우 따지지 않고, 대통령의 자전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긍정이든 부정이든 더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회고록 중 '이성적이라고 알려진 독일 국민' 대한 이야기가 짧게 나오는데, 독일 국민들은 선동에 좀처럼 휘말리지 않는다고 한다.
나치 선동에 휘말렸던 아픈 역사가 있어서, 반대 급부로 비판적 사고 내지 합리적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현상이 각 사람의 머릿속에 벌어지는 개체 단위 현상인지, 구조적 안전망 즉 조직 단위의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경험을 반추함으로써 각성이 가능하다는, 반가운 얘기다.
다시 생각해보니, 합리성의 계발은 개체 단위 현상 같다. 누구나 쉽게 선동되고, 눈이 흐려질 수 있다. 지능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환경과 교육의 문제다. 잘 속는 사람도 몇 번의 아픈 경험 또는 창피를 겪으며 날카롭고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변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크고 작은 거짓말에 많이 당하곤 했다.
강변역에서 고향 내려가던 날, ATM에서 돈을 뽑자마자 집에 내려갈 돈이 없다며 2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던 사람에게 돈을 쥐어준 일이 있었다.
집에 내려가서 그 일을 말하자 가족들은 "아이고, 사기 당했네"라며 탄식했다. 나는 돈을 빌려간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안타까운 상황에서 돈을 빌린 것이라며 그 사람을 옹호하고 가족에게는 강하게 반발했다. 결과는 뻔했다.
이외에도 사촌형에게 수십만 원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은 일, 광우병 파동 때 겁에 질려 소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모두 피했던 일 등 지금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무지의 역사가 숱하다.
하지만 덕분에 어느 때부터인가 지나치게 침착해졌다. 심장이 벌렁거리게 만드는 메시지를 맞닥뜨릴 때마다 머리는 냉수를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흥분한 사람을 보면 나는 더더욱 입을 다물고 침잠했다.
그렇다고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억울하거나 불쾌한 일을 겪으면 분노하고, 그것을 분출하기도 한다.
내가 감정을 피하게 되는 경우는 '감정이 주입되고 있다고 느낄 때'이다.
특히 기사를 읽을 때, 주장이 담긴 글을 읽을 때 그렇다.
단순한 사실을 쌓아올리며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 서적을 읽을 때 묘한 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정반대로 설명 가능하다. 호소가 담기지 않고, 중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킬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변한다. 10년 전의 나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이 친구,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지나치게 철들지 않고, 지나치게 순진하지도 않은 어떤 선을 찾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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