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과 인출

by Dongeun Paeng
Jun 05, 2024 · 만 34세

독서의 끝은 글쓰기라는 말이 있다.

입력이 인출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2023년 1월 28일 수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약 500일이 지났다. (1.37년)

작게나마 사업을 운영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최고 속력이라고 할 순 없지만, 시간 당 입력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500일 전에는 exe^x 를 미분하면 exe^x 라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500일 사이에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실감이 난다.


'같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세 배를 성취한다'는 포부는 대학 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있었다.

나는 과연 보통 사람들이 1,500일(약 4년) 동안 나아갔을 만큼 나아갔을까?


아무튼,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입력이 있었다. 배운 것들을 어떻게든 인출해보려고 했는데,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간결하게 쓸 재주가 없다. 재주? 실은 재주가 필요한 건 아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쉽게 설명하려면, 재주보다는 깊~은 이해가 필요한데, 아직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단순한 개념들로 추상화하기엔 아직 구체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다르게 설명해볼까? 주어진 문제를 푸는 건 쉽다.

문제라는 건 유형이 반복되기 마련이고, 이전에 그 문제를 맞닥뜨린 적이 있다면 쉽게 풀 수 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의 창의성도 한계가 있으므로, 비슷한 유형이 반복되기 마련이니까.


더 중요한 건 수학 대상 사이의 관계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응용수학이든, 순수수학이든 '의미'가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수학을 공부할 때는 펜과 종이도 필요하지만, 의자와 신발도 필요하다.

앉아서, 걸으면서, 깊이 사색해봐야 한다. 음미해봐야 한다. 지금 배우고 있는 게 무슨 의미인지.


예를 들어, 연립일차미분방정식을 풀려면 당연히 행렬이 필요하다.

행렬의 고유벡터와 고유값을 조합하면 일반해를 구할 수 있다.

그렇게 미분방정식을 푸는 건 쉽다.


그런데 대관절 행렬이 뭐길래 이게 풀리는 걸까? 행렬이 뭐길래...?

행렬은 수학자(대표적으로 Cayley)들의 발명품이자 계산 도구다. 근데 발명품 치고는 너무 신비롭다.

아마 행렬을 고안한 사람들도 정작 행렬의 신비한 성질을 알고는 깜짝 놀랐을 거다.


행렬은 연립미분방정식도 풀고, 선형 변환도 설명하고, 군론에도 활용된다.

수학 대상들은 잘 연결된다. 수학자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개념을 도입하면 그게 여러 영역에서 골고루 요긴하게 쓰인다.


이런 연결과 일관성을 고민하는 게 수학 공부의 진정한 묘미 아닐까?


grad, div, curl, 선적분이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물리 개념은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Hessian matrix가 테일러 급수의 이차항을 구할 때 왜 유용한지.

PDE를 풀 때 왜 푸리에 급수가 등장하는 건지.

벡터 공간을 일반화하면 왜 군이 되는지.

선운동량과 각운동량은 왜 닮았는지.

팩토리얼이 왜 지수함수보다 빠르게 증가하는지.


이런 주제들은 흥미롭다. 연구자들이 보기엔 너무 초보적이겠지만.

이런 것들을 고민하다 보면 더 추상적인 수학, 그리고 그 안에 감춘 복잡성을 공부하고 싶어진다.

지금 내가 아는 기초적인 추상을 이용해 단 한 층만 올라가더라도 얼마나 더 신비롭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다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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