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기회로

by Dongeun Paeng
Nov 29, 2024 · 만 34세

고통을 기회로, 실패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침착해야 한다.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침울해하면 기회를 포착할 수 없다.


이 블로그에 글을 쓰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기는 내 일기장이기도 하니까.


고통과 기회를 반추해보자.


고통


어제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다. 어느 고객과 나눈 대화가 문제였다.


고객은 나보다 조금 어린 의사다. 다빈치에서 그의 병원 웹사이트/어드민 등 예약 서비스를 개발했다.


프로젝트 끝날 때쯤 유지보수 제안서를 보냈는데, 이게 사건의 발단이 됐다. 유지보수 비용이 턱없이 비싸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후술하겠지만 고객의 오해였고, 화상 회의로 오해를 잘 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잘못도 크다. 내가 제시한 금액은 full service 기준 800만 원, basic service 기준 300-400만 원이었는데, 나는 고객이 이 정도 투자할 여력과 용의가 충분하다고 착각했다. 이 착각의 원인은 고객이 스치듯 뱉은 말을 단서 삼은 나의 판단이다. 영업 미팅 당시, 고객은 "마케팅 대행 업체에 월 2천만 원씩 쓰고 있지만 실제로 마케팅 도움이 거의 없어서 그건 사실상 그냥 날아가는 돈"이라고 했다. 게다가 병원의 월 순이익이 3-4억 원 이상일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에, 나는 웹사이트/어드민 처럼 중요한 제품에 1천만 원 이하의 금액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고객에게 웹사이트/어드민은 그 정도로 고관여 제품이 아닌 듯했다. 나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여하간, 내가 스트레스 받은 것은 오해 때문이 아니라, (오해할 수 있지) 오해한 상황에서 그의 태도였다.

화상 회의를 시작하고 나서 우선 고객이 쭉 얘기를 했고 나는 듣기만 했는데, 들은 문장을 verbatim으로 옮기면 이렇다.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독서모임에서 대표님 얘기를 워낙 많이 들었는데..."

"프로젝트 말미가 되자 요청을 자르는 게 보였다"

"유지보수 금액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소에도 회의 마칠 때마다 "수고했어요"라고 한 마디 하고 사라질 때 나와 우리 팀을 부하 직원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말들을 들으니 '이 사람은 평소부터 나를 대할 때 말조심이 필요 없다고 느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 이게 중요하다. 상대방이 나한테 말조심을 하는가. 즉 상대가 나를 존중하는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도 하지 않고 '나는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불쾌했다.

물론 고객 말을 쭉 듣고 나서, 인간관계론에 입각해 예의 바르게 대응했다.

나는 "충분히 그렇게 느끼셨을 것 같다. 하나씩 설명해드리겠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나서, 그의 생각이 왜 오해인지 하나씩 다 풀어주었다.


제일 큰 오해는 '유지보수'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그 고객이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알아본 바, 유지보수는 무료 또는 30만 원 정도에 6개월 간 제공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제안한 유지보수 비용은 월 300~400만 원이었다. 여기서 그 고객은 나를 사기꾼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나라면 비용 차이가 상식으로 설명 안 되면 원인을 찾을 것 같은데, 고객은 나를 몰상식한 사람으로 분류한 듯하다. 솔직히 이건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럴 수 있다. 오해하는 마음은 잘못이 없다.


나는 이렇게 알려주었다.


"다른 곳에서 얘기하는 6개월 간의 유지보수는 원래 당연히 무료로 하는 것이고, 저희는 6개월이 아니라 무기한으로 해드린다. 그건 당연한 것이어서 유지보수라고 지칭하기도 어렵다. 진정한 유지보수는 시스템이 튼튼하게, IT 기업에서 관리하는 제품처럼 꾸준히 개선해가는 과정이다. 유지보수 필요 없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반드시 하실 필요가 없다. 병원 사업에 웹사이트가 중요한 판매 채널로서 꾸준히 발전하길 바라시는 것 같아 제안드린 것이다. 점진 개선하려면 주니어 개발자 한 명 이상 원내에 두어야 할 텐데, 주니어 개발자 한 명만 채용해도 월에 500만 원은 깨질 테니 그보다 저렴한 가격에 다빈치를 구독하라는 게 취지다."


실로 고객이 이번 프로젝트를 발주한 이유는 프랜차이즈 본사가 되어 MSO 사업을 하고 싶어서라고 했는데, MSO 사업을 하면서 개발자 한 명 인건비도 쓰지 않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가맹점 어드민을 꾸준히 보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고객이 IT에 월 400만 원도 쓸 생각이 없다면 이미 MSO 사업을 포기한 것과 다름 없다.


내 설명은 이미 제안서를 읽으면 알 수 있는 내용들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글이 중립보다는 세일즈에 더 가까웠고, 글 작성의 목표도 독자로 하여금 유지보수(구독) 서비스를 신청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해를 야기한 것 같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내 설명이 끝나자 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왔다.


"대화를 하고 나니 너무 명쾌하네요"

"이 부분은 제게 책임이 있는 것 같네요"

"제가 바빠서 이 부분은 신경을 못 썼네요"

"아 저도 기억이 나네요"


정리해보면, 구독 서비스 가격으로는 합리적이라는 것을 고객도 인정했다. 다만 구독 서비스가 필요할 정도로 웹사이트/어드민이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제안한 유지보수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업무적인 문제는 그렇게 해결이 됐지만, 텁텁한 기분은 남았다.

속단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왜 그 속단을 함부로, 감정을 담아 드러내는지.


특히 다빈치는 신뢰와 평판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컨설팅 회사이므로, 사기꾼 취급을 당했다고 느끼자 나도 속으로 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회의 말미에, 프로젝트를 깔끔하게 종료하고 유지보수는 필요 시 다른 곳에 맡기라고 권유했다. 고객은 내년쯤 새로 추진할 프로젝트로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그 연락도 받고 싶지가 않다. 혹시 우리에게 부탁하더라도 이 고객과는 다시 일하지 않을 생각이다.


기회


회의를 마치고 한참이나 씁쓸한 기분을 곱씹었다. 조금 침착하게 돌아보자, 아픔을 품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손해라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얻어갈 것이 분명 있을 터였다.


'오늘 일을 바탕으로 다빈치를 어떻게 더 좋은 회사로 만들 수 있을까?'


몇 가지 구체적인 개선 방안이 머릿속에 정리되었다.


  1. 첫째, 유지보수 대신 구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유지보수와 개념 분리를 명확히 하자.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개발자 채용 대신 구독하는 셈이라고 설명하자, 고객은 바로 그 가치를 이해했다.
  2. 둘째, 디자인처럼 품질 측정이 어려운 요소는 프로젝트 중간마다 "통과"를 명문화하자.
  3. 셋째, 고객 입장에서는 대화/의사결정을 기억하기도 어렵고, 글을 차분히 읽기도 어렵다. 갈등 비용을 프로젝트 견적에 더 충분히 포함해두자.
  4. 넷째, feature freeze(추가 요청사항을 못 받는 기간)를 처음부터 잡아두자. 프로젝트 종료일 3주 전부터 feature freeze라고 미리 얘기하고, 애초에 프로젝트 길이도 넉넉하게 3주 정도 더 붙여서 잡아두자.
  5. 다섯째, 제안서에 구독 서비스가 필수가 아니란 점을 명시하자.


고객이 나를 서운하게 한 것 가지고 내가 꽁하게 있으면 어린애 같은 컨설턴트에 그친다. 그보단 모든 사업 스트레스를 '사업을 더 키우는 방향으로' 기회 삼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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