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스럽게 읽기

by Dongeun Paeng
Sep 25, 2025 · 만 35세

요즈음 책 읽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게다가 천천히 읽어나가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올해 안에 코스모스를 다 읽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좋은 책은 빠르게 읽어선 안 된다는 것을 매번 더 깊이 느낀다. 코스모스는 개념 밀도가 높아서 한 문장 한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가 크다.

예를 들어보자.


4장 천국과 지옥에서, 퉁구스카 사건의 원인으로 학자들이 내세운 가설 중 하나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사건의 원인을 물질과 반물질의 소멸 현상에서 찾으려고 했다. 날아가던 반물질 조각이 어쩌다 물질인 지구와 충돌해 엄청난 양의 감마선 복사를 방출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돌 지점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았으므로 그 제안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예전이라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읽는 방법이 다르다. 저자인 칼 세이건이 이 문장으로 전달하려고 한 내용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반물질이 무엇인지, 물질과 반물질의 소멸 현상이 무엇인지, 감마선이 무엇인지, 복사가 무엇인지, 방사능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냥 종이에 적힌 문장을 외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위의 문장들을 그대로 읊을 수는 있으나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칼 세이건이 말하려던 것은 이런 것이다. 개념 밀도를 낮추어 풀어서 설명해야 하므로 길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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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물질이다. 우리가 만지고 보는 모든 것은 물질이다. 그런데 우주에는 이 모든 물질과 쌍을 이루는 반물질이 있다. 이 둘이 만나면 소멸 현상(annihilation)을 일으키는데, 이 때 두 물질의 질량이 모두 에너지로 바뀌는 놀라운 현상이 있다. 이 때 에너지는 주로 전자기파의 형태로 방출된다. 전자기파 스펙트럼은 파장의 길이가 긴 순서대로 아래와 같다.


라디오파,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


파장의 길이는 주파수와 반비례하고(광속 = 주파수 x 파장 길이), 주파수는 에너지와 비례한다(에너지 = 플랑크 상수 x 주파수). 따라서 감마선은 에너지가 아주 높다.

우주는 진공이므로 물이나 공기 같은 매질이 없다. 매질이 없어도 전자기파가 방출될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복사 또는 방사라고 한다.


원자나 분자는 양성자와 전자 수가 같은 중성 상태를 유지하는데, 감마선처럼 에너지가 큰 전자기파는 원자/분자의 전자 수를 바꾸어 이온화를 야기한다. 이를 전리라고 한다. 우리 몸의 세포에서 이온화가 일어나면 세포가 파괴되고 DNA가 손상된다. 그래서 감마선 복사 같이 전리를 일으키는 복사를 전리성 복사라고 따로 분류한다.


전리성 복사를 일으키는 전자기파(e.g. 감마선)는 방사선이라고 하며, 이러한 방사선을 방출하는 능력을 방사능이라고 한다. 퉁구스카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지역에서 감마선이 방출되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물질과 반물질의 충돌(=소멸) 현상 또한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반물질설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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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칼 세이건이 짧은 문장을 쓰기 위해 자신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었던 지식들을 추적하다 보면, 그 분량이 몇 배로 늘어난다.

조금 과장하자면 코스모스의 한 쪽을 깊이 읽는 것은 깊이가 더 얕은 책을 한 권 읽는 것에 준한다.


위 반물질 가설 이후에는 블랙홀 가설이 단 세 문장으로 뒤따른다.


"또 다른 이들은 블랙홀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했다. 소형 블랙홀 하나가 시베리아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지구를 관통해서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의 충격파 기록을 조사해 보면 그날 이후로 북대서양 쪽으로 물체가 튀어나갔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블랙홀이 지구를 관통하는 모습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게 충격파와 대관절 무슨 상관일까? 충격파는 정확히 뭘까?


칼 세이건은 위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문장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이 책을 통해 전하려고 했던 지식을 온전히 얻어가자면 나 또한 위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 책을 정복하고 나면 우리나라에서 코스모스를 제일 꼼꼼하게 읽은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책은 모두 이런 태도로 읽어야 한다. 모티머 애들러의 "How to read a book"을 읽은 덕분에 얻은 값진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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