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여행 - 5. 이민

by Dongeun Paeng
Feb 14, 2015 · 만 25세

여행을 하면서 가장 나를 많이 충동질 했던 것이, 이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든다. 꼭 우리나라에서 살 필요가 있을까?

 

이민을 하는 게 더 나은 삶에 가까워지는 길이겠다는 생각은 그냥 직관적으로 들었던 생각인데, 글로 정리하면서 몇 가지 이유로 쪼갤 수 있었다.

 

1. 한국은 경쟁과 비교가 심한 고등학교식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스트레스 받음.

 

끝없은 경쟁. 정상에 오르면 다시 정상끼리 벌어지는 더 높은 레벨의 경쟁.

몇 없는 자리를 놓고 벌이는 무한경쟁.

상위권에 주어지는 엄청난 힘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기대.

낱낱이 공개되는 순위와 그에 따른 집단 내 비교의식.

 

위의 특징들은 흔한 한국 고등학교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선 좁은 땅덩어리, 높은 인구 밀도, 후덜덜한 집 값 때문에 서울에 터를 마련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요즘은 서울대 나와도 큰 집 사기 어렵다고들 한다. 집이 잘 살지 않는 이상. 죽어라 공부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도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급급한 사회라면 비정상이지 않은가?

 

좋은 일자리가 몇 없다 보니 서울대를 졸업하고서도 그들끼리 또 한 번 경쟁을 한다. 국내10대기업, 로스쿨이 좋은 예다. 여기가 아니면 차라리 취업 재수를 하기도 할 정도니 좋은 일자리라는 게 얼마나 적은지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2013년 하반기 서울대 인문계열 졸업생 취업률이 42.3%라는 무시무시한 통계치가 나오기도 했고. (통계적인 오류가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좋은 일자리란, 돈을 많이 주는 것 외에도 문화적으로 혹은 배울 게 많은 일자리를 말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회사가 별로 없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간략한 설명, Employee Value Proposition(EVP)에 대한 글은 링크를 클릭. 이런 것은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편 서울대생이라고 하면 사회와 주변 지인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있어서, 진퇴양난의 상황이 펼쳐진다. 더 큰 문제는 서울대가 아니어도 모두가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다들 죽도록 열심해 준비했으니까. 스펙도 어마어마하고, 해외 경험도 다들 있고, 대외활동도 활발히 했으니 기대를 안 걸 수가 없는 선행 투자인 것이다.

 

이런 한국에 사는 게 정말 행복할까? 한국에서 사는 이상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직장을 가고 어떤 집에 사는지, 누구와 결혼하고 얼마나 성공하는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의식&무의식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페이스북을 닫는 게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종류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페이스북을 닫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반면 내가 여행다니는 이 곳에 천혜의 자연이 펼쳐져 있고, 누구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돈 적당히 벌어가면서 살면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는 내가 과일장수를 하든 선원을 하든 누가 비웃거나 그러지 않는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내게 거는 기대도 없으니까.

 

이민이 내 정신 건강에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치열한 한국 사회로부터 잊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너무 똑똑한 선후배,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위치를 찾아야 하고 그들의 기준과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 가령 ~~~한 직장이 좋은 직장이고 ~~~한 직장은 별로야, 라는 얘기를 들은 이상 그 생각들을 무시하고 My Way를 가기란 쉽지 않다. 설령 그런 세속적인 줄세우기 사고방식이 구태의연하고 유치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누가 비웃을 것 같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다니는 회사를 변호해야 될 것 같고, 여러 복지 혜택들을 자랑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역겨운 기분도 자주 들었다. 내 선택에 대해 항상 변호하고 증명해야 하는 좁은 사회가 답답했다.

 

직장을 나와 혼자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는 그런 고민이 전혀 없었다. 24시간 내가 하는 행동 모두가 나의 의지로 결정되었고, 그것에 대해 누구에게 설명하거나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잠이 부족해도 피부가 물광을 낸 것마냥 반짝거리고, 여드름 같은 것들도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한국에서도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하면서 마음 편하게, 스트레스 덜 받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제대로 서 있어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와 상관 없이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부러울 따름이다ㅠ

 

2. 이민을 하면 리스크를 걸기가 쉬워진다.

 

우리나라에서 risk-taking,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쌓아놓은 여러 안전장치들을 풀어놓아야 한다. 내 경우에는 학벌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좋은 회사 들어가서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그러자니 인생이 심심할 것 같고. 사업을 하자니 바닥으로 내려가기가 두렵다.

 

그런데 이민을 하면 마음 편히 바닥에서 쌓아올릴 수 있는 환경이 자동적으로 조성된다. 일단 이민자의 신분으로 학벌을 내세우거나 인맥을 활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시작점이 거의 바닥이다.

 

이민자로서 사업을 잘하고 못하고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 이민자가 자기 사업을 어디까지 키울 수 있을까?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동남아시아 최고의 부자들은 대부분 화교다. 필리핀 대기업 상위권은 전부 오너가 중국인이다. SM몰도 그렇고, 다른 것도 있었는데 이름을 까먹었다.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밀크셰이크가 맛있었던 Killiney도 중국인이 세운 기업이라고 한다.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로컬 브랜드는 십중팔구 화교가 세운 기업이다. 말레이시아에서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말레이시아 경제는 중국인이 다 잡고 있다고. 그래서 정부 고위직에도, 1인자는 말레이시아 사람이지만 2인자부터는 중국인이 심심찮게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후진국 시장만 그럴까? 포츈 500대 기업을 보자. 아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 같은데 포츈500대 기업의 41%가 이민자 1&2세대가 세운 기업이다. (2010년 기준 - 한글 기사 링크 / 영문 보고서 링크)

 

어떻게 이민자들이 이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High Risk, High Return. 이민자는 크게 망해도 별로 쪽팔릴 것이 없다. 원래 바닥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바닥을 칠 용기도 있다. 사업을 하다 망하면 오늘 처음 이민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default setting이 0이기 때문에 리스크에 대해 더 큰 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3. 다른 나라에 살면 생각이 넓어진다.

 

꼭 우리나라에 발 붙이고 살 필요는 없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작은 생각이다. 그런 생각에는 어렵게 지켜낸 국토라는 역사적 배경이 한 몫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민을 전쟁통에 보따리 지고 도망하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이민은 더 큰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나는 대전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minor version of 이민을 경험했고) 큰 물이 개인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대전에 살았다면 내 버킷리스트 중에는 '여자친구랑 남산타워 가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울 사람이 보기엔 소탈한 소원이다. 마찬가지다. 지구 전체로 보면 우리나라는 대전 같은 작은 동네에 불과하고, 세상에는 더 크고 발달하고 재밌고 살 만한 나라들이 많다. 우리나라에만 머무르는 것은 시골사람으로 만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4. 더 나은 사회환경.

 

한국 사회 자체가 세계에서 드물 정도로 기형이다. 동남아시아보다는 훨씬 낫다. 여기 정치인들은 아직도 상당히 부패했다. 그런데 한국도 그리 좋은 나라는 아니다. 좀 발달한 말레이시아 정도의 느낌? ㅋㅋ 개인적으로는 싱가포르보다 못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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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들로, 이민자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하나 쪼개서 생각하거나 글로 읽어본들 해외에서 사는 것의 매력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직접 나와서 눈으로 보고, 생각도 많이 하고,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 사는 얘기도 들어보면 직관적으로 느낌이 온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 사는 것이 손해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번뜩 드는 순간이 온다.

 

나는 홍콩에서 한 번, 싱가포르에서 한 번,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한 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한 번 그런 생각을 느꼈다. 가만 보니 가는 곳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오늘은 호주에 온 첫 날인데 아직 그런 생각은 안 든다.

 

이민에 관한 글은 여기서 마치지만, 비슷한 얘기로,

인생이 곧 여행이고, 여행하며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내가 일하는 터를 한 곳에 두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것에 대한 얘기를 추후에 쓰려고 한다. 그 글은 제목을 뭐로 하지. 역마살이라고 해야 되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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